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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Jun 12. 2019

육아의 언어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삶의 선택지에서 가장 나중에 택하고 싶었다. 나에게 육아란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는 것 만큼이나 굳이 하고 싶지도, 할 자신도 없는 일이었다. 20대 중반부터 육아 스포일러를 너무 많이 당한 게 그 이유였다. 선배들의 육아 고충을 들으면 들을수록 저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막연한 다짐이 굳어졌다. 내 돈 주고는 절대 볼 일 없는 영화 얘기를 하루 종일 지겹도록 듣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길인데 왜 저렇게 힘들다며 징징대는 건지, 그때의 나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러, 생물학적 노산이 코앞인 나이에 나는 아이를 낳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아르헨티나행 편도 비행기에 올라타다니.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임신과 출산은 막상 겪어 보니 프롤로그에 불과했다. <나의 육아>의 본격적인 첫 챕터는 혼자 아기를 돌보는 것이었다. 출산은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했고, 조리는 조리원에서 해주는 대로 하면 됐는데, 아기를 돌보는 건 처음 접하는 외국어로 갑자기 프리토킹을 하라는 것 같았다. 

신생아 육아의 난관 중 하나 #새벽수유 


수유텀이 얼만지, 기저귀는 몇 번 갈아줘야 하는지, 울면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지, 기본 지식조차 없는 상태로 나는 그렇게 육아 전선에 뛰어들었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인지 미리 겁먹었던 거에 비하면 육아는 제법 할 만 했다. 육아의 속성은 루틴함이라, 그 루틴이 몸에 익으면 저절로 굴러가지는 면도 있었다. 가장 힘든 건 육체의 피로가 아니었다. 공동 육아 파트너인 배우자와 서로 눈치 보고, 짜증을 참고, 원망을 감추며 부부 사이에 흐르는 온갖 시궁창 같은 감정을 견뎌내는 게 가장 힘들었다. 몸의 피로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지만, 한 번 벌어지고 틀어진 부부 사이는 쉽게 회복되거나 바로잡아지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상대의 뉘앙스에 매우 민감하다는 게 문제였다.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단어, 행간을 곱씹게 만드는 얕은 한숨, 묘하게 뒤틀린 억양 하나에도 눈이 쭉 째지곤 했다. 아이를 낳기 전에도 서로의 언어에 빈정 상해 싸움을 거는 경우가 잦았는데,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더 심했다. 육아라는 전쟁터에서 언어는 아픔을 가시게 만드는 아스피린이 되기도 하고, 상대의 자존감을 짓밟는 탱크가 되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육아의 언어에는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캐치하기 힘든 미묘한 뉘앙스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에게 가급적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말이 있다. 바로 '내가 할게'다. 텍스트만 놓고 보면 이보다 더 따뜻하고 배려심 넘치는 말도 없다. 문제는 상황과 뉘앙스다. 남편은 내가 뭘 하는 게 탐탁지 않거나 답답할 때 "내가 할게, 내가 할게!" 이렇게 같은 말을 두 번 빠르게 반복하곤 한다. 기저귀 갈 때, 옷 갈아입힐 때, 재활용 쓰레기 버릴 때, 욕실 바닥을 닦을 때, 남편은 손사레를 치며 속사포처럼 "내가 할게, 내가 할게!"를 외친다. 육아라는 극한 상황에서 남편이 다급하게 외치는 이 말은 “저리 비켜!”의 뉘앙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말 중에 '내가 할까?'가 있다. 이 말의 속뜻은 '내가 하기 싫으니까 네가 좀 할래?'다. 정말 내가 할 마음이 있다면 굳이 '내가 할까?'라는 의문형으로 상대의 동의를 구하진 않을 거다. 물음표만 하나 붙었을 뿐인데 '내가 할게'와 의미가 사뭇 달라진다. 이게 육아의 언어가 가진 복잡미묘한 뉘앙스의 포인트다. 


육아를 할 때 가장 듣고 싶은 말, 또 반가운 말은 '내가 해 놓을게'다. '내가 해 놓을게'는 '내가 할게'처럼 빠르게 두 번 외칠 일도 없고, 원망이나 짜증의 뉘앙스도 없다. 내가 청소 해 놓을게. 내가 빨래 해 놓을게. 내가 저녁 해 놓을게. 육아의 최전선에 있는 두 전우가 따뜻한 전우애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은 이때다. 내가 다 해놓을 테니까, 자기는 그냥 와서 쉬어. 이 얼마나 많은 배려와 사랑이 스며 있는 아름다운 육아의 언어란 말인가. 


얼마 전 영화 <기생충>을 봤는데 코미디에서 스릴러로 장르가 전환되는 지점이 기가 막혔다. 봉준호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우리 생활 속에 이미 여러 장르가 있다고 했다. 육아 중이라 더 와닿는 말이었다. 배우자와 사이가 좋으면 세상 이렇게 훈훈한 가족드라마에 달달한 로맨스가 없고, 사이가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순식간에 서스펜스 스릴러로 일상의 기류가 전환되곤 하니까 말이다. 


상대의 언어에 울고 웃으며, 육아는 나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의 뉘앙스에 털 끝까지 반응하는 건 매순간 육아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 거다. 사실 이 마음만 내려놓아도, 나와 상대의 육아 기여도를 면밀히 평가하고 비교하는 것만 하지 않아도, 일상의 장르가 스릴러로 변하는 일은 없을 거다. 나는 오늘도 불평하고 원망하다 반성하고 숙연해지면서 그렇게 남편과 육아의 언어를 나눈다. 남편이 "내가 해 놓을게"라는 따뜻한 말을 건네주길 기대하고 또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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