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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Jul 24. 2019

거짓말과 담배

얼마 전 남편이 차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렸다. 임신 기간 금연에 성공한 걸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나를 속인 거였다. 남편 말로는 다시 피운 지 2주 정도 밖에 안 됐다고 했지만, 2주가 됐건 두 달이 됐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속인 게 문제였다.


부부싸움을 최대한 빨리 끝내려면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의 태도가 중요하다. 피해자의 심경에 최대한 공감하며 엎드려 사죄하는 시늉을 '피해자가 원할 때까지' 하면 된다. 상대가 충분히 화를 낼 수 있게 시간과 감정을 충분히 내어주면 부부 사이의 앙금은 깊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남편은 이걸 놓쳤다. 걸린 순간 담배를 피운 적 없다는 2차 거짓말과 “아차차 걸렸네” 하는 멋쩍은 미소가 리액션의 전부였다. 미안해 & 잘못했어 & 다신 안 그럴게. 내가 원하는 <화난 아내 달래주기> 3종 세트는 없었다.


머쓱해하며 웃는 그의 표정에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실망을 느꼈다. 왜 그랬냐는 취조에 대한 대답은 한술 더 떴다. 지난번 부부싸움 이후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됐다는 거다. 나 때문에 담배가 땡긴다고? 내가 금연 실패의 원인이라고? 불난 집에 휘발유 부은 격이었다. 나는 이성을 잃었다.


금연 1주년이 되는 날 무슨 선물을 할까. 오랫동안 피워온 담배를 끊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 또한 금연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 담배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 잘 안다. 나와 아이를 위해 오랜 악습을 버린 남편이 참 사랑스럽고 든든했는데. 그게 다 거짓말이었다니. 담배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재정 문제도, 회사 문제도, 여자 문제도 다 속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불신의 망상이 먹구름처럼 내 머릿속을 뒤엎었다. 담배가 뭐라고! 우리 사이의 신뢰는 와장창 금이 갔다.

 

ㅇㅇㅋㅅ가 담배 아니라는 건 어불성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남자들은 아내를 기만한다고 밖에서 떠벌리는 남자들이다. 업무 외적인 이유로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고 집에 가서 꼬인 혀로 "일 때문이야~~"라고 큰소리치는 남자들(어휴 좀 맞자). 와이프 몰래 담배 피우면서 "우리 와이프는 절대 몰라~"하며 본인의 거짓말 스킬을 자랑하는 남자들. 비상금 허투루 쓰면서 아내에겐 꽃 한 송이 선물하지 않는 남자들. 그중 죄질이 가장 나쁜 건 담배였다. 담배로 인해 가장의 건강이 악화되면 그 피해와 책임은 고스란히 아내와 아이의 몫이니까.


각설하고(생각할수록 열이...), 담배 사건으로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르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처음엔 손이 떨리고 눈물이 밀물처럼 마구 차올랐는데, 나중엔 그렇지 않았다. 그래, 복수를 하자. 거짓말과 담배 때문에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자.


보통 반나절이면 감정이 가라앉는데 남편의 거짓말로 인한 분노는 만 이틀을 갔다. 퇴근 후 남편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아이를 맡기고 집 근처 산책로를 하염없이 걸었다. 바람이 불자 기분 좋은 풀 냄새가 났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한 엄마들을 보니 마음은 울적해도 눈에는 웃음이 걸렸다.


날 위로해주는 그곳


벤치에 앉아 맥주도 한 캔 마셨다. 옆에 앉은 중년 부부에 눈이 멈췄다. 아무 대화 없이도 참 편안해 보였다. 그래, 우리도 저렇게 늙어가겠지. 서로 다투고 원망하면서도 진심 어린 사과나 화해 없이 일상이라는 시멘트가 모든 걸 발라버리는 과정을 반복하며 살아가겠지. 함께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음에 안도하며.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걷다가 집에 들어가니 혼자 웅크린 채 잠든 남편도 처량해 보이고, 엄마 없이 잠들었을 아이를 보니 분노의 감정을 빨리 풀지 않으면 이 작은 것이 피해를 입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남편을 원망하고 미워할 순 없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잘못이지만,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 나는 남편을 용서하고 싶었다.


담배를 피우지 말 것.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다시 금연 치료를 시작할 것. 나에게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말 것. 몇 가지 다짐을 받아내고 부부싸움은 종결됐다. 당신을 향한 감정이 예전 같지 않다고 싸늘하게 쏘아붙였지만, 나는 여전히 남편을 뜨겁게 사랑한다. 혼자 벤치에 앉아 잠시 멍 때리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던 그 시간에 감사한다. 육아 파트너에 대한 불만과 원망의 마일리지가 차곡차곡 쌓였을 때, 왠지 그 벤치를 또 찾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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