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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영 Dec 26. 2019

당신의 먹성에 지칠 때

평일엔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별로 없다. 출근 전과 퇴근 후만 함께 있으니 아이 케어하다 보면 얼굴 마주하기도 힘들다. 겹치는 시간이 적으니 싸울 일이 적고 비교적(?) 평화롭다. 피곤하지만 평온한 일상이다. 문제는 주말이다.


주말 아침 남편은 "뭐 먹지?"로 하루를 시작한다. 먹는 것에 대한 욕구가 남편만큼 크지 않은 나는 주말엔 한 끼만 잘 먹자 싶다. 아침부터 상추 찾은 남편에게 부아가 치민 지난 주말의 기록이다.


남편이 시댁에서 얻어온 강된장이 불화의 씨앗이 될 줄이야. 어머님이 음식을 매우 잘하시기 때문에 남편은 어머님이 싸주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어깨가 5센티 정도 올라간다. "우와~~ 진짜 맛있다~~~" 하며 자부심 뿜뿜하는 뉘앙스도 곁들이는데 자격지심 심한 나는 이런 말이 "넌 왜 이렇게 못하니"로 들릴 때도 있다. 이건 나도 인정하는 정신병이니 그냥 넘어가자...(완치가 어렵다).


1에서 100까지 한 끼 잘 차려먹는 점수를 매긴다고 하면, 나는 20 정도에도 만족한다. 반찬은 한 개만 있어도 되고, 음식은 차갑지만 않으면 된다(나름 이 원칙은 지킨다). 세팅하는 걸 좋아하지만 밥보단 술 허기짐이 커서 안주 하나에 술 세팅하면 그저 행복하고 그마저도 술이 우선이다.


남편은 이런 나와 반대다. 떡볶이 먹을 땐 삶은 달걀이 반드시 올라가야 하고, 오뚜기 피자 데워먹을 때도 "치즈 가루 솔솔 뿌리면 좋겠다~"는 멘트를 빼먹지 않는다. 그래, 치즈 솔솔 뿌리면 맛있기야 하겄지...그런데 애 보랴 집안일하랴 녹초가 된 상황에 치즈 가루에 삶은 달걀 타령을 하면 나는 <그저 웃지요^^> 모드가 된다. 입맛이 좋은 게 아니라 먹성이 과한 것 같아서다.


그날 아침이었다. 시댁에서 가져온 강된장에 밥 비벼 먹자고 했더니 상추가 있어야 한단다. <연안식당> 스타일로 먹고 싶다고. 상추가 꼭 필요하단다. 아침 9시였다. 일어나서 아이 밥부터 부랴부랴 먹인 직후였다. 마트 가서 상추 사 올지 고민하는 남편을 보며 나도 모르게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님하 제발...

보통날이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그날은 오전 11시에 브런치 약속이 있었다. 2시간 후면 브런치 먹을 텐데 9시에 상추 사 와서 <연안식당> 스타일로 강된장에 밥 비벼 먹고 싶다고? 오마이갓김치!!!


나는 적당히 뭉갰고 남편은 입이 댓발 나온 채 "그래, 당신 맘대로 해(=뭐든 니 맘대로지 이 못된 것아)"라는 일격을 날렸다. 맞다. 나는 결국 내 뜻대로 한다. 남편의 의견을 기분이 아주 상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묵인하고 "그냥 이렇게 하면 안 될까~?"라고 내 의견을 관철시킨다. 이것 때문에 부부 사이가 나빠지고 주말엔 어김없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게 되지만.


최근에 넷플릭스로 영화 <결혼 이야기>를 보며 아이가 있고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닌데 이혼을 결심한 부부의 사연에 매우 공감했다. 이혼은 맨 정신으론 하기 힘든, 특히나 나처럼 극세사 멘탈을 가진 사람들에겐 함부로 권할 게 아니라는 감독의 조언도 절절히 와닿았다.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하고 애정 어린 이혼은 없다. 이혼은 서로의 빤스를 벗겨 은밀한 곳에 있는 사마귀의 털까지 지적하는 치부 찾기 싸움이었다.


남편이 영화를 보며 그랬다. 모든 걸 남편 찰리에게 맞추며 살아온 부인 니콜의 심정이 너무 이해된다고. 그 말에 뜨끔했다. 인테리어, 정리 방식, 소소한 생활 습관까지 나는 내 맘대로 안 하면 미쳐 버린다! 내가 더 움직이고 바지런을 떨어서라도 결국 내 방식대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음식, 요리, 밥!!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그거 하나 들어주면 어디 큰일 날까. 강된장에 상추를 먹고 싶으면 상추 사 오라고 하면 됐을 것을. 나는 왜 또 거기서 눈을 세모로 뜨고 비난의 레이저빔을 쏴댔을까. 그래서 얻는 게 뭔데? 상추값 정도는 벌었을지 몰라도 부부 사이는 더 나빠졌다.


여보, 당신의 자율권을 무시하고 행복할 권리를 침해해서 미안해. 당신의 먹성에 가끔 지칠 때도 있어. 하지만 먹성은 당신의 코어야. 코어를 침해하지 않도록 앞으로 더 신경 쓸게. 이번 주말엔 잘 먹자.


디스하려고 쓴 글인데 결말이 어쩌다... 결혼의 본질이자 모순을 또 이렇게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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