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비록 답은 다르다 해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단다. 함께 물으며 단 한 가지 답을 요구하지 않는 장소라면, 그곳에는 아집은 없으리라. 서로 주체성으로 타자적 주체성을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 복음과 상황>의 뉴스 레터 <서사의 서사〉 16회 글 말미에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가 적은 글이다. 그랬건만 나는 다시 모인 독서 모임에서 독선적인 언행을 내뿜었다.
스페인 14세기의 민중 생활과 기독교 신앙을 그린 8부작 드라마 〈아르나우의 성전〉을 시청한 뒤였다. 귀족 영주의 횡포와 농노들의 피폐한 삶, 기독교의 유대인 핍박과 엄격하고 무지한 규율과 폭력에 한껏 화가 나 있었다. “사실, 예수 운동이 기독교라는 종교로 집단화되며 권력을 거머쥐고 걸어온 길이란, 그야말로 집단적 무지, 폭력, 음모, 그리고 학살과 점령의 길을 걸어온 것 아닌가요?” “오늘 일부 교회와 개인들을 제외한 기독교회의 배타와 혐오, 교단들의 횡포는 그와 같은 기독교의 역사와 이어진 것이지 않은가요?” “계속해서 기독교를 하나님과 예수를 믿는 종교라 칭해도 되는 건가요?” “누군가는 좋은 것만 생각하고 말하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현실에 대한 비판과 반성 없이 좋게 나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요?” 매우 강한 표현을 써서 말했을 뿐 아니라, 모두가 같은 답을 갖고 있다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서사의 서사〉에 글을 보낸 나와 다른 나였다.
잠시 침묵! 나는 다시 물었다. “왜요? 아닌가요?” 차분한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단정 지을 수만은 없지요. 왜냐면 기독교에는 그야말로 다른 흐름이 있었고, 그런 개인들도 많았으니까요.” 순간 나갔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나의 앎, 거기에서 나온 말과 글, 그리고 삶의 불일치를 마주했다.
내가 말한 기독교 안에 있고, 내가 말한 기독교와는 다른 결을 갖고 목회를 하는 분들이 내 앞에 있었다. 교회를 떠나있는 내가 구체적으로 마주하지 않는 막연한 대상인 교우들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게, 현재 목회를 하면서 늘 마주하는 구체적인 대상 교우를 향한 마음이 어쩔 수 없이 나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조금 늦게 가더라도, 어떻게든 함께 생각을 바꿔가려는 분들의 마음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리고 만일 지금 내가 목회를 하고 있다면, 나는 어땠을까? 지금의 나와 같이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나도 지금과는 달리 생각했을 것이다. “앎이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날 읽은 책을 나누고 한 분이 던진 이 물음이 나를 떠나지 않았고 나는 다시 묻는다. “삶까지의 시간과 거리는 얼마나 되는 걸까?”
과연 집에 돌아와 〈아르나우의 성전〉 속편 〈땅의 상속자들〉 8부작을 시청하니, 모임에서 나눴던 이야기 때문인지 다시 보이는 게 있었다. 학살과 점령이라는 기독교 세계 안에 오직 사랑과 선한 양심의 아름다운 기독교 정신으로 모진 삶을 이어가며 살아간 사람들! 그렇게 거대한 물결 안에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 가슴 시리게 고통스러우며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들! 드라마는 어쩌면 내가 분노한 기독교의 폭력성이 아닌, 그 안의 드러나지 않는 고통스럽게 아름다운 사랑의 여정을 밟아나가는 이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독서 모임에서는 읽은 책에서 언급된, 앎에서 삶으로 간 사람들, 믿음의 모범이 되었던 전태일과 유물론자로서 예수의 길을 걸어가기로 한 서준식 이야기와 그들이 남긴 책 이야기가 있었다. 책이 책을 부르고 여전히 앎에 머물러 있는 나는 다시 책으로 간다. 전태일의 일기와 수기, 편지를 모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와 인권운동가 서준식의 《서준식 옥중서한》이다.
전태일의 죽음이 자살이었다는 이유에서일지 모르겠으나 그의 삶의 동기가 된 기독교 신앙이 의도적으로 은폐되었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엔 《전태일 평전》만 읽더라도 그의 신앙은 충분히 드러나는데, 그의 신앙이 은폐될 수 있다는 사실은 좀 의아하다. 그의 삶을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절판이다. 중고책으로 네 권 정도 있었다. 1988년 돌베개에서 발행한 중고책이 23,000원에서 108,000원까지 네 권 올라와 있었다. 23,000원에 배송비 3,000원을 얹어 26,000원으로 제일 저렴한 책으로 결제를 마쳤다. 그리고 읽지 않은 채 책상에 모셔진 서준식의 《서준식 옥중서한》(야간비행)을 찾아냈다. 얼마 동안 이 두 책을 읽게 될 것 같다. 두 책이 나를 어느 만큼 삶으로 데려가줄 수 있을지.
앎에서 삶까지의 거리가 시간이 멀지만, 여전히 책의 힘을 믿는다. 책은 나를 무지에서 앎으로 이끌어왔고, 아주 더딜지라도 삶으로 이끌어주리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앎이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물음에 “누군가는 읽고 알려야 해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기록하고, 누군가는 그 기록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알리고 변하든지, 변하고 알릴 것이다.
〈서사의 서사〉를 읽으며 알게 된 ‘전후 민주주의자’이면서 ‘장애인의 아버지’ 오에 겐자부로의 장편소설 《개인적인 체험》(을유문화사)을 빌려온 게 4월 27일.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일주일 넘겼을 때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기로부터 도망치다가 마침내 받아들이기까지의 청년 아빠의 갈등과 고뇌, 그리고 탈선,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자신의 자리.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무관하지 않은 작품이다. 자녀의 장애, 가족의 장애, 그리고 본인의 장애. 혹은 선천적인 장애, 후천적 장애를 회피할 수밖에 없지만, 마침내 정면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철저한 고립무원의 시간과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할 수 있겠지만) 이해하려는, 이해할 수 있는 게, 그래서 길가에 이미 죽어있는 작디작은 참새조차 밟지 않으려고 차를 돌리며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게 ‘사람다움’이라고 책을 읽으며 확인한다.
막심 고리끼가 그의 작품 《어머니》에서 어머니를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 해석했다면, 어쩌면 오에 겐자부로 역시 독자가 모든 장애인의 아버지로 재해석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이렇게 책을 읽음으로, 내가 몰랐던 세계를 만나며, 과거 《전태일 평전》을 읽고, 또는 《의자놀이》(휴머니스트) 등을 읽고,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읽으며 노동자의 어머니에게로 내 삶(아직은 정신과 마음)의 방향을 바꿔왔듯, 또 이제까지 억울하거나 슬프거나 혹은 유쾌한 장애인의 삶을 그린 책들을, 혹은 인간중심주의를 살아가는 시대에 비인간들의 편이 되어가는 중일지 모른다.
여전히 어떤 누군가는 사건을 사고로 만들어 철저히 기억을 지우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억울한 주검을 지우고 덧칠하는 노력에 맞서, 진실을 기록하고, 그 책을 만들고, 또 읽는 이들이 있는 한, 그 책이 우리의 무지를 앎으로 이끌고, 아직은 앎에 서성거리는 나 같은 사람들을 조금씩 삶으로 인도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또 읽는다. 앎이 삶이 되는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