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보다 대화

초기 문해력을 위한 가정 문식성 처방 1

by 기혜선

며칠 전 낡은 핸드폰에서 재미있는 녹음 파일을 발견했습니다.


옛날 옛날에 착한 호랑이가 살았쪄.
그 호랑이는 고기가 먹고 싶었져.

둘째 아이 목소리였어요. 세 살이나 네 살쯤 되었을까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애교 가득 담긴 목소리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집니다. 아마도 둘째 아이가 <하얀 눈썹 호랑이> 그림책에 빠져있을 때인가 봅니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어달라고 했던 책이거든요. 나쁜 사람은 혼내주고 착한 사람은 도와주는 신비한 호랑이 이야기에서 자신만의 호랑이를 만들어낸 듯합니다.


호랑이.jpg <하얀 눈썹 호랑이> 이진숙 글, 백대승 그림 / 한솔수북

아이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 속 호랑이는 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대요. 그래서 고깃집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하는 거예요. 호랑이는 사람들과 고기를 사이좋게 나누어먹었고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착한 호랑이 덕분에 사람들도 좋고, 호랑이도 좋았져. 끝~!

아마도 그날 밤 고기반찬을 해줬던 것 같아요. 고기가 먹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가정 문식성


최근 여러 분야에서 많이 쓰이는 리터러시(Literacy)라는 용어는 본디 '읽고 쓸 줄 아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일 수도 있고 어떤 '성격'으로도 의미 지어지면서 우리말로는 '문해력', '문식성'으로 번역되어 왔지요. 사실 우리말에서 리터러시가 가진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매체 발달 이전에는 문자 텍스트에 대한 능력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문해력'이라는 말이 틀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자 텍스트의 읽고 쓰기 능력이라는 한자 풀이는 한계가 있습니다. 리터러시는 단순히 기능적으로 읽고 쓸 줄 아는 것 즉 글자를 읽고 해독하는 능력을 넘어섭니다. 읽고 이해하고 적용하고 실천하는 개념까지 확장되거든요. 리터러시 개념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뒤에서 좀 더 자세히 하겠습니다. 리터러시 개념이 결국 독서 교육, 학습력의 기본이니까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리터러시의 발달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아이의 말이 트이는 과정에서 익힌 언어 이해력, 언어 구사능력은 읽고 쓰기 능력으로 직결될 수 있습니다. 구어의 발달이 읽기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거나 듣고 말하기에서 읽고 쓰기로 발달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언어적 발달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리터러시 발달이 시작되며, 어린 시절의 읽기 능력의 격차는 성인기까지 점점 더 벌어진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읽기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지요. 이를 매튜효과(Mettew effect)라고 합니다.


output.png 초등 1학년 읽기 능력 차이는 성인기로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어린 시절 언어적 경험과 언어능력 발달을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모든 학습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리터러시 발달(읽기 능력 발달)에서 가정의 역할은 지대합니다. 가정 문식성(family literacy)이라는 용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까닭도 그러한 이유일 거예요.


가정 문식성은 보통 문식 환경(home literacy environment)으로 생각됩니다.


1) 책에 친해질 수 있는 환경

2) 다른 사람의 독서 활동을 관찰할 수 있는 환경

3) 스스로 책을 골라 읽을 수 있는 환경

4) 다른 사람과 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

5) 어떤 문제 해결을 위해 읽고 쓰기를 활용하며 협력할 수 있는 환경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읽고 쓰는 기회를 제공하고, 자신보다 능숙한 사람의 전략을 모방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가정의 문식 환경의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가정 문식 환경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조금 더 자세히 하고요. 이번 편에서는 구어 발달과 언어 이해에 대해 조금 더 초점을 두려고 합니다. 읽기라는 언어기반 활동에 구어 발달은 읽기의 선행 효과와 같은 영향력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읽기 이전에 대화


앞서 오래된 녹음 파일 속 아들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고기가 먹고 싶은 마음을 호랑이에게 대입해서 이야기로 풀어냈지요. 이는 구어에서 시작한 언어적 이해와 확장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조금 예민한 편이었어요. 늘 잠이 문제였거든요. 겁도 많아서 잠에 들기까지 오래 걸렸고 중간에 엄마를 찾는 일도 많았습니다. 덕분에 잠자리 독서는 일찌감치 포기했어요. 아이가 하나일 때는 적절히 조절할 수 있었는데 둘이 되니 두 아이 사이에서 그마저도 조율이 힘들더라고요. 특히 불을 켜고 책을 읽으니 잘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점점 더 말똥말똥해지는데 안 되겠는 거예요. 그래서 책 읽기 대신 옛날이야기 들려주기로 바꾸었습니다.


일단 불을 끄고 눕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엄마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줬어요. 아이들은 이야기가 끝나면 당연히도 "또!"를 외칩니다. 입말 이야기의 장점은 다양한 각색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콩쥐팥쥐'와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섞이기도 하고요. 낮에 있었던 일이 이야기 사건으로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자야 하는 상황으로 유도하기도 훨씬 용이하지요. 가끔 잔꾀도 냈어요. 너무 피곤한 날에는 그동안 핸드폰에 녹음해 두었던 들려준 이야기들을 틀어주기도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아이들이 "오늘은 내가 들려줄게"라고 하더라고요.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들려주기도 하고 어떤 날은 다른 사람이야기를 이어받아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세니컬과 르페브(Sénéchal & LeFevre, 2002)는 가정 내에서 비형식적 문식활동(이야기책 들려주기, 읽어주기)과 형식적인 문식활동(단어 읽기를 가르치는 등 기능적인 활동)이 일어나는데, 이야기책을 들려주거나 읽어주는 비형식적 문식 활동이 훗날 아동의 독해능력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으며 글자를 가르치고 단어 읽기를 연습시키는 형식적인 문식활동은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아이들의 학습에 도움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아이들에게 다양한 언어적 경험이 필요하며 이해와 흥미 측면에서 들려주기와 읽어주기가 꽤 유의미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용을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의 상호작용입니다. 즉, 주고받는 대화적 활동이 중요하다는 것이에요.


아이들의 말이 트이고 이후 읽고 쓰기 능력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정에서 아이들이 대화에 참여하고 듣는 활동입니다. 미국의 언어 인류학자 히스(Heath)는 가정 내 대화의 양과 질을 조사하기 위해 여러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미국 저소득층 지역에 사는 미혼모들이 자녀와 나누는 대화를 조사했는데 500시간 녹음 본 중에 자녀와 엄마가 4회 이상 대화를 주고받은 사례는 단 14건이었다고 합니다. 녹음된 대화의 대부분은 엄마의 일방적이고 간단한 지시이거나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묻는 정도였다고 해요. 히스의 연구도 그러하지만 처음에는 대화 경험의 차이가 부모의 경제 수준, 사회적 지위와 영향이 있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양이 꼭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라는 연구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이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하게 하는 경험에 차이가 있고, 이는 가정에서 부모와의 상호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대화가 어휘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이미 여러 연구에서 부모의 평균 사용 단어 양은 자녀의 단어 사용과 밀접한 영향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만 3세 정도의 아동이 사용하는 단어의 90%는 부모가 사용하는 단어라고 해요. 다시 말해 부모가 1일 평균 단어 양이 적고 수준이 낮은 단어를 사용할수록 자녀는 훨씬 더 적은 수의 단어를 사용하게 되고, 어휘 수준도 낮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단어, 의미, 구문과 같은 언어 요소를 가정에서 배웁니다. 뿐만 아니라 언어 사용의 목적도 배웁니다. 질문하고 대답하는 방법, 이야기하는 방법, 어떤 문제 해결을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 등을 배울수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대화하는 경험은 어른들과 말할 때와 친구들과 말할 때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가치있는 말과 그렇지 못한 말도 알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언어적 경험은 나중의 학업 성취뿐만 아니라 사회를 살아가는 자원이 되겠지요.


대화의 양뿐만 아니라 질적인 측면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아이의 말에 주의 깊게 반응하고 호응하기. 일명 긍정적인 리액션은 아이들의 대화 태도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요. 자신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간직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부모를 이야기하고 싶은 상대로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긍정적이고 개방적인 질문을 해주세요. 첫 번째 반응이 정서적인 측면이었다면 두 번째의 질문은 인지적인 자극입니다. 답이 없는 질문을 하는 거예요. 아이가 결정할 수 있는 질문, 아이의 생각을 묻는 질문이지요. 아이들의 상상력, 창의력 등 인지적 사고력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아이들이 우연히 듣는 어른들의 대화 그리고 그 대화에 참여하는 긍정적인 경험 등이 구어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당연하겠지요.


가정에서 아이의 읽기 능력 더 나아가 언어 발달을 위해 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이자 가장 최고의 방법은 아이들과의 대화입니다. 가능하면 이른 시기에 자주, 흥미로운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세요. 특정 언어에 대한 뜻을 아는 것은 물론 주변 상황에 적절한 표현 능력, 맥락적 이해까지도 발달할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본격적으로 가정에서 책 읽기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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