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직도 멀었다 1

by 기혜선

나의 여행 벽(癖)은 대물림된 것이 분명했다.

아빠는 한때 여행 가이드가 꿈이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무작정 떠났던 무전여행이나, 비행기 한 번 타기 어렵던 시절 일본 출장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나는 어린 시절 극장에서 보았던 ‘대한 늬우스’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흑백 화면 속에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많은, 어리고 젊은 아빠가 주인공이었다.

엄마는 처음 MRI 검사를 받고 온 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여행이었나보다고 말했다. 정밀 검사 소견에 걱정을 한가득 품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통 안에 누워있으니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무서움이 몰려왔다고 했다. 이러다 없던 병도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자, 엄마는 기분 좋은 일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건 여행뿐이더란다. 그 통 안에서 그동안 다녔던 여행지의 좋았던 장면을 하나씩 떠올렸다고. 나는 무심하게 듣고 있었지만, 엄마의 좋은 순간에 내가 없다는 사실이 못내 속상했다.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떠올린 건 여행지의 풍경이었을까, 여행지에서 자신의 모습이었을까.


두 분에게 여행은 각자 인생에 대한 치하 같은 것이었나보다. 하와이 빼고는 다 가봤다고 할 정도로 두 분은 열심히 여행을 다녔다. 마치 치열하게 살았던 인생에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하지만 그 치하의 기간은 그리 길지는 못했다. 할머니에게 치매 증상이 나타나고 거동이 불편해진 뒤로는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 두 분이 오랜만에 여행을 계획했다.

일주일에 세 번 방문하던 요양보호사님이 매일 방문하기로 했고, 출산 후 육아휴직 중이던 동생이 친정에서 지내기로 했다. 세상의 많은 것에서 멀어져가던 할머니가 유일하게 반가워하고 반응하는 증손주와 열흘간의 동거가 예정되었다. 두 분은 우리에게 미안하다며, 몇 번이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스페인에 도착하고 제대로 된 관광을 시작이나 했을까?

동생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건 두 분이 떠난 지 이틀째 되는 날, 늦은 오후였다. 나는 수업이 한창이었고 요양보호사님도 퇴근했을 시간이었다. 수업 중이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찍혔을 텐데 재차 전화가 울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언니, 할머니가 이상해. 엉덩이가 아프다면서 앉지도, 일어나지도 못해. 낮에 소파에서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고 하시던데. 아무래도 이상해.”

나는 동생에게 119를 부르라고 하고, 남은 수업을 정리했다. 응급실에서 만난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집에 가자고만 했다. 어떻게 아픈지 검사만 해보자고 달랬지만 겁을 잔뜩 먹은 할머니는 계속 같은 말만 하고 있었다. “구급대원이 집에 왔는데 할머니가 안 가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너무 힘들었어. 오는 내내도 계속 집에 가자고만 하셨어.”

10kg이 넘는 돌쟁이를 내내 매달고 뛰어다닌 동생은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는 증손주와 눈만 마주치면 “아가~”하고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만 반짝 살아나는 눈빛에, 동생은 앉지도 못하고 아이를 맨 채 할머니 곁에 서 있어야 했다.


고관절 골절이었다.

수수깡보다 더 텅텅 비어버린 할머니의 뼈 사진을 보며 의사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곧 근육이 빠질 거고 그럼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돌아가시게 되는 거라고 의사는 너무 평온하게 말했다.

더 충격이었던 건 태어날 때부터 같이 살았던 할머니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병원에서 묻는 어떤 것에도 우리는 답을 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주민등록번호는커녕 파상풍 주사는 맞았는지, 복용 중인 약이 있는지, 알레르기가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결국 스페인으로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매 순간 좌절했고, 매 순간 눈물이 났다. 엄마가 그토록 무서워하는 국제 전화비도, 시차도, 심지어 그곳에 있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엄마 아빠의 마음조차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는 6인실 병동에서 집에 가자며 소변 줄을 잡아 뜯는 할머니와 밤새 싸웠고, 소변이 샌 침대 시트를 갈다가 쓸려가 버린 할머니 틀니를 찾느라 피와 오물이 묻은 환자복과 시트가 담은 통을 뒤지기도 했다. 환자복을 갈아입히는 일은 옆 환자 간병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겨우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할 줄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빨리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왔고, 나는 온종일 중얼거렸다.

“멀었다…. 너는 아직 멀었다….”


그 무렵 나는 석사 논문을 쓰고 있었다. 결혼한 지는 13년이나 되었고 아이는 초등학생이었다. 제법 선생님 소리를 들었고 참지 못하고 잘난 척을 하는 순간도 있었다. 길고 길었던 그 이틀 동안 사무치게 깨달은 건 나는 아직 멀었다는 사실이었다. 나이를 먹는다고, 지식을 쌓는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었다. 잃어버린 틀니를 찾아달라고 병원 구석구석을 뛰어다닐 줄만 알았지 실제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머니가 까무룩 잠이 들면 나는 참고 있던 울음마저도 주체할 수없어 쏟아내야 했다.


사흘이 지나자, 병원에서는 요양병원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병원에서는 더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의사는 할머니에게도 요양병원이 더 편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우리 할머니는 집에 가고 싶어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집으로 갈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엄마가 미리 신청해 놓았다는 요양병원은 입원한 병원에서 500m, 사거리만 건너면 되는 거리에 있었다. 할머니는 곧 이동식 침대로 옮겨졌다. 사흘 사이 부쩍 말수가 줄었고, 더 이상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지 않던 할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할머니는 구급차를 다시 타면서 집으로 돌아가는거라 생각했다는 걸,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컨디션이 좋아진 할머니가 그저 반가웠고, 이동식 침대에서 어지러워하는 할머니에게 조금만 참으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요양병원 앞에 내리자, 할머니는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집에 안가?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할머니는 계속 여기서 지내게 될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여기 조금 더 있어야 한다고 얼버무리는 나를 보던 할머니는 내 대답이 다 끝나기도 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새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입원 절차를 밟아야 했고, 의사를 만나야 했다. 할머니의 짐도 챙겨야 했고, 가족들에게 연락도 남겨야 했다. 내가 바쁜 척을 하는 사이 할머니는 정신을 놓았다. 정신을 잃은 상태인 걸 발견한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었고 나는 또 무력하게 울었다. 할머니가 돌아온 후 의사는 나에게 말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다시 병원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보호자가 상주할 필요가 없는 요양병원에 나는 아침저녁으로 들렸다. 할머니는 잠깐 눈을 떠서 보다가 내가 누군지 물으면 모르겠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고모 이름을 불렀다. 또, 어떤 날에는 그런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내가 널 모르겠냐고 말하기도 했다.

6인실 간병인 아주머니는 손주들이 끔찍하게 할머니를 위한다며 물었다.

“매일 오는 남자가 누구야? 동생이야? 매일 저녁 와. 자는 할머니 옆에서 한참을 울고 가던데.”

아기만 보면 반짝 살아나는 할머니를 위해 둘째 동생이 돌쟁이를 데리고 수시로 들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서울에서 자취하며 회사 다니던 막내가 퇴근을 병원으로 하는 건 몰랐다.

우리의 기나긴 열흘이었다.

월, 금 연재
이전 03화3. 새똥 맞은 스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