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직도 멀었다 2

by 기혜선

숱한 날들 사이로 무수한 열흘이 흘러간다.

어제까지 흘려보냈던 당연한 열흘이 누군가는 숨을 붙잡고자 애썼던 날들이었고,

완벽한 날이라 외쳤던 그날이 남은 이들에게는 애타는 날이었음을 곱씹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어제 납골당에 모셨어.”

열흘 만에 공항에서 만난 남편이 말했다.


다들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 데 나만 유독 꼬이는 느낌이었다.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처럼 아름답기만 하던 이론이 내 논문에 내리면 폭우가 되었다. 그러다 교수님이라는 큰 산을 만나면 호우주의보가 내리고 재해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폐허가 되어 논문은커녕 이런 게 있었지 따위의 전설로 남겨야 하나 싶을 즈음 겨우 햇살을 찾았다. 그리고 이제 써보자 할 때, 할머니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고관절 골절, 입원, 요양병원 이송.

이 모든 일이 부모님의 스페인 여행 열흘 동안 일어났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열흘이 지나고 엄마가 돌아오자, 모든 것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정말 모든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그랬다. 나는 다시 논문을 쓰고, 미뤄두었던 수업을 하고, 아이들의 저녁을 차릴 수 있었다. 마흔을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엄마가 모든 해결책이라는 사실이 한심하면서도 그 사실이 주는 안도감에 편안했다. 요양병원에서 힘들어하던 할머니도 엄마가 오신 후에는 밥을 받아먹었고 기대어 앉기도 했다.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할머니도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우리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았고, 나는 빠르게 주변인이 되었다.

그랬다. 분명하게 주변인이었다.

힘든 봄을 치열하게 보낸 보상이라며 여행까지 계획했던 걸 보면.


논문 인준 본에 도장을 찍고 그 기분에 취해 잡은 여행이었다.

우연히 눈에 띈 유럽 패키지 상품을 들여다보다가 소심하게 “3국만 후딱 다녀올까?” 건넨 말에 남편은 5개국 열흘 일정을 제안했다. 일주일을 비우나, 열흘을 비우나 큰 차이 없다며. ‘이왕이면, 가는 김에.’ 라는 남편 말에 스스로에 대한 생일 선물이라며 근사한 의미를 붙인 건 나였다.


“할머니, 딱 열흘만, 열흘만 다녀올게요. 다녀와서 만나요.”

나는 중환자실에 누워계시는 할머니 귀에 대고 말했다. 여행을 떠나기 일주일 전, 할머니는 식사량이 부쩍 줄면서 간호사실 바로 앞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미 취소할 수 있는 기한이 지나버린 여행에서 내가 할 선택은 뻔했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계속 물었다. 가도 되는 거 맞냐며. 여행 전날 할머니에게 열흘만 있다가 오겠다고 말하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동생은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날따라 한자리에 모여 있던 우리 세 남매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병상에 누워 해맑게 웃어주는 할머니와 사진을 찍었다.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베네치아, 밀라노, 로마, 피렌체를 거쳐 스위스 인터라켄을 찍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를 지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무리하는 내 생애 처음이자 적어도 지금까지는 마지막 패키지여행이었다. 여행 내내 내가 초등학생 두 아이를 챙길 일은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야무지게 가이드 뒤꿈치에 딱 붙어 다녔고, 덕분에 나는 나대로 온전하게 유럽을 즐겼다. 우리는 에펠탑 크기에 놀라고, 모나리자 앞의 인파를 헤치며 놀라고, 두오모 성당 앞 비둘기에 놀라다가, 스위스 청량한 공기에 놀라며 일주일을 보냈다. 놀랍게도 떠나기 전 나의 일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던 8일 차,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에 있었다. 아이들은 조식에서 나온 빵에 생일 노래를 불러주고, 관광 일정에 있던 크리스탈 월드에서 용돈으로 받았던 100유로를 모아 내 생일 선물을 사주었다. 완벽한 생일이었다. 아이들이 사준 선물을 자랑하는 메시지에 남편은 축하한다는 답장를 보내왔다. 나중에 헤아려보니 할머니 장례를 치루고 있었을 시간이었다. 말해도 오지 못할 우리를 위해 모두들 함구를 약속했다고 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나는 생일 축하 메시지만 잔뜩 받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치러졌을 할머니의 장례식을 상상했다.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데 쏟았을 가족들의 마음을 상상했다. 미안함이 앞서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다. 그저 누군가 그날의 한 장면을 회상하면 가만히 듣다가 조각보를 깁듯 그날들을 조각조각 이어 볼 수밖에 없었다.

문득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날이 생각났다. 둘째 아이를 품고 배가 제법 불렀던 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큰아이를 기다려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내가 늦게 온 것을 두고 서운함을 토로하던 엄마를 보고서야 엄마의 엄마를 보내는 일에 마음이 소홀했던 나를 깨달았다. 어렸고 몰랐다고 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임산부였던 나는 곧 장례식장에서 쫓겨났다. 동생들이 상복을 입고 장례식장의 잔일을 돕는 동안 나는 드문드문 장례식장에 들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은 상복을 두 번이나 입는 사이, 나는 또 입지 못했다.

멀었다. 나는 어른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던 것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 후문 앞에는 늘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토피가 심했던 내가 등에 땀이 흐르면 쓰라릴까, 할머니는 내 가방을 대신 멨다. 숨이 넘어가려는 할머니 귀에 큰 손녀 곧 온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던, 나는 본 적 없는 아빠의 모습이 자꾸 그려졌다. 나는 그 뒤로 꽤 오랫동안, 꽤 자주 할머니 꿈을 꿨다.

우리는 매해 내 생일 전날 밤에 제사 음식을 차린다.

덕분에 매해 나의 생일은 풍성하다. 할머니의 큰 그림이었을까.

할머니 제사와 나의 생일이 세트가 된 지 10년이 흘러간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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