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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AXO Apr 10. 2022

다시 보자는 말을 안 했다

Beach bunny - painkiller

'안'과 '못'은 다르다. '안'에는 의도와 의지가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보자는 말을 안 했고 어쩌면 걔도 그걸 알아서 우리는 서로에게 다시 보자는 말을 안 했다.


나는 걔가 유령이었으면 했다. 어느 날 없어져버려서 그 이후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언제든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과거로 남기를 바랐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나한테 말을 건 걔가 정말 짜증 난다. 사실 제일 짜증 나는 건 아무렇지 않을 줄 알고 받아줬지만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는 지금의 나 자신이다. 번번이 잘못된 사람에게 휘둘리고 마는 나의 안목이다.


그러니 저번에 들었던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내가 낸 첫 책을 보고 '사랑에 관심이 없기는 개뿔, 사랑을 절절히 갈구하는 애가 써놓은' 일기장이랬다. 윤여정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남이 아는 나와 내가 아는 나, 그 모두가 나 자신이다. 누군가가 내게 너는 사랑에 목마른 애야! 하면 그런가 봐, 할 수밖에 없다. 허락해준다면 텅 빈 눈으로 사랑이 뭔데? 하고 물어볼 작정이다. 인격체로서의 존중과 관심, 돌봄이 필요하다는 말이 여전히 '여자는 사랑받고 싶어 한다'와 겹쳐 들린다면 그냥 그런 여자가 되는 수밖에는 없다. 남들에게는 착각할 권리가 있고 내게는 설명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따지고 보면 나만큼 컨셉에 충실한 애는 없을 것이다. 너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매사가 귀찮아 보인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자기 것에만 푹 빠져 지내는 애로 보이니 아무도 건들지 않고 내버려 두나 보다. 백발의 노교수님께서도 마스크를 쓴 다른 사람들 눈은 못 읽겠지만 내 눈은 무엇에 집중하는지가 다 들여다보인다고 하셨다. 어떤 친구는 내 핸드폰 케이스에 나를 빗대서 설명했다. 까만색 케이스 안에 덕지덕지 붙은 스티커들. 또는 기껏 붙여놓은 스티커들을 투박하게 가려버린 케이스. 아무도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들여다볼 생각을 '안' 한다. 또는 '못' 한다. 케이스는 절대 단서를 주지 않으니까. 나는 어쩌다 그런 케이스가 되었을까?


괜찮아 보이는 것,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쿨하게 적당히 넘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가 존재한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도 분위기를 잡치면 안 되니 하하호호 웃거나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라도 일단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거다. 하지만 윌 스미스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리스 록에게 주먹을 날린 것이 한참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을 때, 내게는 록산 게이의 칼럼이 제일 와닿았다. 사회적 약자들이 두꺼운 낯짝(Thick skin)을 갖추게 된다면, 당연히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런데 약자성을 희롱하는 농담을 배짱 좋게, 또는 우아하게, 별 트러블 없이 받아넘기는 문화가 교양이라면 그 교양은 '누구에게' 좋은 걸까?


흑인 여성의 모발에 관한 사회문화적 이슈를 다루는 다큐멘터리까지 찍었던 크리스 록이 머리스타일을 걸고넘어지면서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할 때, 제이다 핀켓 스미스 대신 날뛰고 눈물을 흘리고 시상식에서 추방당한 건 윌 스미스였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부당한 상황에서 '감정'을 드러냈을 때에 그걸 숨기지 않은 것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었으면 될 걸 왜 일을 크게 만드느냐, 하는 게 모든 비난의 요지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랄 때는 언제고, 인간적인 날것의 분노 앞에서는 바로 그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만 문제가 된다. 결혼생활이 별로였던 걸 아는데 위선적이라는 둥, 그 마초적인 공격성이 배우자를 향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둥, 폭력은 어떤 의미로도 정당화가 될 수 없다는 둥, 모두 맞는 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윌 스미스는 역대 아동 성추행범과 가정폭력범들보다도 많은 욕을 먹고 전쟁 등의 이슈보다도 더욱 뜨거운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아 그래서 죽지 않고 부활해버린 내 짝사랑하고 두꺼운 낯짝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 하면, 사실 나는 이제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한 척을 좀 그만두고 싶다. 아마 그런 척들을 그만두는 게 나 자신에 대한 예의 같다. 아무도 나를 존중해주지 않고 돌보지 않고 관심 갖지 않을 때에, 그런 사실에 전혀 관심 없는 척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잠수 탄지 반년 만에 불쑥 다시 내게 친구가 되자고 하는 애한테 나는, 갖은 용기를 끌어모아서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난 말야, 몹시 화가 나 있어! 친구라니, 네가 원하는 '친구'가 대체 뭔데?


아마 나만 가만히 있으면 걔하고 나는 어쩌다 한 번씩 만나서 하하호호 근황 토크를 하고 저녁을 먹고 영화나 공연을 같이 보고 그런 적당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걔 입장에서는 복잡한 과거를 덮어두고 대충 그 정도의 친구로 지내자는 '호의'에 해결되지 않은 숙제를 던져주는 애가 달가울 리가 없다. 하지만 솔직함이 없어야만 이어질 가식적인 우정이라면 시작되지 않는 게 낫다. 나는 내 감정과 상처를 충분히 돌보지 않고서 친구를 해줄 마음이 없다. 받아줄 걸 아니까 선심 쓰듯 건네는 값싼 우정, 그건 너무... 비참하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고 나는 늘 그랬듯 내 앞의 음식을 제대로 못 먹었지만, 더 이상은 예전의 뚝딱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걔와의 대화에 참여했다. 망할 놈의 돌려 말하기를 그만둬야 하는데, 나는 하루 종일 내가 뭘 무서워하는지를 계속 설명했다. 나는 차멀미를 자주 한다. 빵빵 소리에 잘 놀란다. 놀이기구를 못 탄다. 그네도 무서워한다. 여기서의 삶은 정말 지루하다. 여름에 한국에서 면허를 따올 생각이다. 그럼 멀미 않고 직접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지. 어디든 갈 수 있다면 너한테서도 벗어날 수 있겠지. 나는 너랑 친구를 할 자신이 없다. 네가 바라는 걸 내가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중에서는 절반밖에 못 말했지만.


가을에 이사를 앞두고 있다. 지금 집에서 짐을 빼야 하고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 짐들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얘 정말 웃기는 애다. 자기 집에 두고 가라는 거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또 사라질 거잖아 아무 말 없이. 그 말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걸 참고 웃었던 것 같다. 귀찮게 하는 걸까 봐, 답장이 바로 오지도 않는 걸 아니까, 나는 이제 얘한테 문자 하나 선뜻 못 하는데, 너는 그런 말이 어쩜 그렇게 쉽냐. 설마 남의 짐을 갖고 잠수 타지야 않겠지 하며 두꺼운 낯짝으로 덥석 고마워했어야 했을까? 모르겠다. 내가 언제쯤 출국하는지 알려줬지만 얘가 기억하고 제때 연락을 줄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헤어질 때에, 나는 다시 보자는 말을 안 했다.


내 짐은 어디에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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