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지 못한다
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읽고
p156 ‘외적으로 순응하되 내적으로 회의하는 이중적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에드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지만 (중략) 에드나는 아내와 어머니로서 살아가는 것이 ‘자신과 맞지 않는 운명’ 임을 깨닫는다.
“여자의 사회적 성취를 막는 가장 큰 적은 모성이야.”
페미니즘의 페자도 모르던 시절 내가 딸에게 한 말이다. 계획 없이 엄마가 된 나는 하던 공부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에 어울리지 않는 나는 외적으로 순응하되 내적으로 회의하는 이중적인 삶을 에드나처럼 살았다.
p226 출산과 육아가 끊임없이 나를 시험하고 변화시킨다. 소설가 레이철 카스크는 [생명의 작업]이라는 제목의 회의록에서 “ 어머니가 된 후 아이들과 함께하는 ‘나’는 결코 진정한 나 지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지 않는 ‘나’ 또한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었다.
나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살면서도 끊임없이 나이고 싶었다. 나이고 싶어서 책을 읽고 나이고 싶어서 운동을 나이고 싶어서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나를 자책했다. 왜 나는 다른 전업주부들처럼 살지 못하는지. 왜 나는 아이들 아빠가 항상 말하듯이 배부른 고민에 빠져있는 것인지. 왜 나는 보봐리 부인이 나 같고 이해가 되는 것인지. 나는 내가 잘못된 것이라고. 내가 그런 내 생각을 표현하고 행동하지 못하지만 생각만으로도 부도덕하다고 나를 괴롭혔다.
나는 사회가 아니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사회가 요구하는 모성의 기준에 부합되기 위해 애쓰면서도 거기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로서도 나 자신으로도 불행했다. 엄마로서 있을 때는 내가 불행했고 나로서 존재할 때는 엄마로서는 부족한 사람 같았다. 난 어디에서도 똑바로 서 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로서의 욕구가 커질수록 나는 엄마로서의 의무로 나를 숨겼다. 내가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더 힘주어 누르면서 그 반대로 더 사회가 요구하는 엄마가 되려고 했다.
딸아이와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 보면 딸의 인생에서 많은 부분이 딸의 인생이 아닌 나의 인생이었음을 최근에 인식하게 되었다. 난 딸을 통해 나의 욕구를 채우려고 했었다. 내가 되고픈 여자가 딸이 되기를 바랐다. 거기엔 딸의 의지나 바람은 없었다. 사회가 정의하는 바른 엄마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딸의 욕구나 바람은 무시했던가.
이제 와서 알고 반성하게 된다. 지금은 너무 무관심한 엄마처럼 딸이 나에게 한 번씩 푸념한다.
“엄마, 나 고3이야, 관심 좀 가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