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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는 사람 Apr 04. 2024

변하지 않을 사랑의 본질

 큰애가 떠났다. 길게 줄 선 출입국 심사대에서 남편은 얼른 가라 재촉을 했고 아이는 몇 번을 뒤돌아보다 마지못해 들어갔다. 조기유학부터 해외취업까지, 20년 가까이 숱하게 겪는 이별이지만 아직도 내겐 익숙하지 않다. 공항에서 헤어질 때보다 집에 돌아왔을 때 허전함이 더하다. 오고 간 횟수가 거듭될수록 큰애가 깜박 잊고 남긴 물건의 개수는 줄어들었지만 우리 세 식구 일상 속 그 애의 지분은 커졌다. 집안 구석구석 아이의 흔적이 숨어있고 냉장고 곳곳에는 큰애 떠나기 전 먹이려고 사놓았던 각종 식품들이 보인다. 유통기간이 지났을 때보다 더 아쉽고 아깝다. 재고로 남은 저것들을 혼자 먹어치울 때마다 나는 큰애를 떠올리겠지. 그럴 때면 유독 입맛이 떨어져 한입 먹는 게 고역이다.


 보름 전쯤, 미국 현지시간에 맞춰 재택으로 밤샘근무를 끝낸 큰애가 안방 문을 빼꼼히 열었다. 이른 새벽이라 깜짝 놀란 나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밥 줄까?"

"아니요..."

큰애는 잠시 주춤하다가 방문을 닫더니 설상가상 내 옆을 비집고 들어와 아예 자리 잡고 눕는다.

'음.. 이게 뭐지? 꿈인가?'

 남편과 나, 그리고 큰애가 한 침대에 누웠던 건 둘째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20년도 넘은 까마득한 옛날이다. 당시 두 돌도 안 됐던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4년 차 직장인이 되어 다시 내 품에 안기다니, 아까보다 더 황당해졌다.

 "무슨 일 있니?"

 "아니요..."

 그렇게 말없이 10분 정도 누워있다가 아이는 나갔고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그날 일은 계속 마음속에 남아있다.




 엄마의 편애에 평생 한 맺힌 나는, 아들 셋을 똑같이 대하기로 진즉부터 마음먹었었다. 예쁘든 밉든 잘났든 못났든 착하든 말든, 모든 기회는 공평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

 아이들에게도 이 다짐을 시시때때로 말하며 행여 애정결핍이나 피해의식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다. 자기만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느끼는 게 얼마나 억울하고 서러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든 완벽할 순 없는 법, 한 번은 큰애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는 왜 나를 더 예뻐하지 않아요? 내가 공부도 제일 잘하고 말도 제일 잘 듣고 착한데?"

 "너한텐 미안한데, 엄마도 어쩔 수 없어. 할머니가 엄마만 홀대하는 게 너무 싫어서 너희들한테는 무조건 똑같이 해주기로 결심했었거든. 너희들이 잘못하면 혼내고 잘하면 칭찬하겠지만 잘한다는 이유로 특별히 더 이뻐하진 않을 거야."

 큰애는 어린 시절의 나 만큼이나 억울해했지만 두 번 다시 따지지 않았다. 그때 내가, 역시 장남이 최고라며 너만 믿는다고 칭찬했다면 큰애는 지금보다 더 훌륭한 청년이 되었을까? 아쉽고 미안하지만 그때는 아이도 어렸고 나도 어렸다.




 큰애들이 20대를 넘기고 막내가 20대에 가까워지면서 공평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아이들 각자 원하는 게 다르고 추구하는 게 다른데 무엇을 기준으로 공평함을 정할까. 유학 중이라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적다고 해서 둘째가 큰애보다 더 애틋하다거나, 한 번도 내 품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해서 막내에게 더 소홀하진 않다. 내 마음속에 아이들은 똑같은 지분으로 세팅되어 있다. 다만 그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이제 공평함은 물질적인 것에만 치우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돈처럼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만큼 공평함을 보여주는 게 또 있을까. 대신 정확한 수치를 가늠할 수 없는 애정표현은 각자의 취향에 맞춰주련다.


 유독 정에 약한 큰애에게는 차고 넘치게, 논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둘째에게는 깔끔하게, 무관심이 땡큐인 막내에겐 시크하게 대한다 해서 누구 하나 불만이라면 이렇게 말해줘야지.

 "그래? 그럼 원하는 스타일을 말해봐. 어차피 본질은 똑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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