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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J크로닌워너비 Jul 12. 2023

잠 못 이루는 낮

헤세의 <잠 못 이루는 밤> 오마주

해가 중천에 떴어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당직실은 고요하고, 컴퓨터에서 나는 소리만 웅웅거린다. 문 바깥에서 바닥을 닦는 소리가 들리고, 먼 거리에서는 간호사와 보호자가 다투는 소리가 난다. 나는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 언성이 높아지고 보호자가 화난 게 느껴진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온다. 아마 병원 밖을 나갔나 보다. 밤새 당직을 섰던 나는 간절히 자고 싶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 크록스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재활운동실에서 환자분들이 떠드는 소리 등이 집요하게 귀에 꽂힌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그 소리의 크기는 점점 잦아들다가도 갑작스레 커지면서 정신이 확 깨어난다. 결국 나는 다시 핸드폰을 켠다. 불을 끄고 누운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켠다. 한차례 늘어지게 하품하고 신발을 신고 당직실 밖으로 나간다.     


“안녕하세요?” 원무과 데스크에 인사하고 병원 밖으로 나간다. 따스운 햇살이 볼을 간지럽히고 습한 바람이 피부를 적셔온다. 눈이 부셔 잠깐 실눈을 떴다가 게슴츠레 앞을 본다. 여러 상가 건물에 간판들이 어지러이 눈에 박힌다. “점심은 뭐 먹지?” 혼잣말한다. 고민하다가 타코 집을 고른다. 간단하게 키오스크에서 계산하고 치즈불고기 타코를 선택한다. 다이어트는 생각하기 싫어 세트를 시켰다. 세트에는 타코에다가 나초가 나온다. 중학교 때 나초 과자를 많이 먹었더랬지. 그 시절 학원 끝나고 먹었던 빨간색 봉지의 도리토스는 정말 맛있었다. 친구들과 나눠 먹으며 떠들던 그 순간들이 둘도 없는 반찬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연락조차 되지 않는 중학교 동창들과 어깨동무하고 피시방에 다시 놀러 다니고 싶다. 그 시절 피시방은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친구들과 나 모두 콜록대면서 게임을 했지만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때는 마냥 재밌게 놀았건만, 어느 순간 학원을 전전하고 바빠지면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때론 기분을 상하게도 했고, 혹은 친구들의 고민을 애써 외면하기도 했었다.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하자면 참으로 어렸다. 지금의 나는 그 어리석지만 순수했던 나보다 찌들어버렸다. 상처를 외면하는 방법은 교묘해졌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깔끔해졌다. 하지만 내보이던 진심은 온데간데없다. 기적적으로 지금까지 이어진 몇 안 되는 진정한 관계들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수많은 진심 없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나 역시 그 속에서 비할 데 없는 쓸쓸함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잠들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며 외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변해버린 내게 주어지는 벌이 아닐까. 잠은 너무나도 친숙한 우리의 친구이자 정신의 휴식을 함께하는 동반자이다. 날마다 당연하게 찾아오니 평소엔 그 소중함을 알 수가 없다. 그러다 한 번 이렇게 불면증을 맞이할 때면 여러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내 신의 없음과 부덕함이 잠이라는 친우마저 내게 등 돌리게 만든 건 아닌가. 그러나 또 어쩌면, 불면이라는 것은 내가 지금 어딘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나침반 같은 게 아닐까. 한 번이라도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는, 걱정이 없는 사람은 과연 자신의 흠결을 돌아볼 수는 있을까.

점점 바빠지고 다급해지는 우리네 삶 속에서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말초적인 감각과 정신을 지배하려는 물질에 열중하는 시간이 물러나고, 오롯하게 내 정신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또 얼마나 될까. 큰 사고를 겪고 상실의 아픔을 겪을 때? 죽을병에 걸려 지나온 삶을 반추할 때? 어떠한 계기가 있지 않고서는 사람은 일상에 파묻혀, 본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망각한 채 살아간다. 끊임없는 경쟁과 절제되지 않는 욕망으로 지속되는 사회 속에서, 자신에 대한 사색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순간들이 의미가 있다. 좀처럼 오지 않는 잠을 부르며 이리저리 뒤척이다 포기하고 생각에 잠길 때, 인간은 계기 없이도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일상의 쳇바퀴는 정신을 잠재우는 수면제나 진정제와도 같다.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등의 내 정신과 존재가 감당할 질문들은 물질적 향락을 위한 일상의 발버둥에 파묻히고 만다. 본디 행복을 위해 물질을 이용해야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위치가 뒤바뀌었다. 이제 사람들은 행복이 아닌 물질을 좇는다. 이 과정이 정신을 잠에 취하게 만들고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가끔 이렇게 육체가 잠 못 이루는 시간이 찾아오면, 지금까지 졸고 있던 정신이 깨어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내가 가는 방향이 옳은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중인가. 내가 좇는 게 정말 나의 행복이 맞는가. 건강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들을 마주했을 때 잡념이라 치부하지 않고 곱씹으며 본래의 자신을 찾아가게 된다.     

또 다른 불면의 가치는 고독을 직면하는 것에 있다. 인간은 항상 외롭지만, 잠들어 있을 때만큼은 외로움을 피할 수 있다. 꿈속에서 유영할 때, 우리는 잠에 취해 속에서 존재의 외로움을 잊고는 한다. 잠, 그리고 그 부산물인 꿈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다. 의학에서 구분하는 잠의 단계라든가, 뇌파라든가. 혹은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정신분석적인 해석 등등. 그런 해석들 모두 의미가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잠은 인간이 존재의 외로움으로부터 잠시 도피하는, 가장 흔하면서도 주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잠은 말 그대로 잠시간의 도피일 뿐, 근본적으로 외로움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깨어있을 때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인간관계에 매달리고 관심을 갈망한다. 이를 위해 우린 필사적으로 달린다. 내가 정말 무엇을 원했는지도 잊은 채 맹목적으로 사회의 기준과 시선에 맞춰 살아간다. 그렇게 사람들 다수는 자기 삶에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간다. 이럴 때 잠은 존재의 외로움뿐만 아니라 스스로 돌아보는 의문들도 같이 가져간다.

불면은 이러한 도피를 인간으로부터 앗아간다. 그렇게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며 전례 없는 고독에 직면하게 된다. 아무리 깨어있는 동안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불면과 맞닥뜨리는 순간 그 모든 건 의미가 없어진다. 그는 침대에 홀로 누운 채 미뤄놨던 외로움이 엄습하는, 어두운 심연을 헤매는 느낌을 받는다. 설령 침실에 배우자가 같이 누워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의 잠은 각자에게 고유하다. 옆에 있는 배우자라고 할지라도 내 잠에 개입하거나 같은 꿈을 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 인간은 불면으로 인해 고독을 직면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불면으로부터 위로받기도 한다. 예컨대 불면은 지금껏 바삐 달려가느라 지나치던 작고 사소한 것들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게 해 준다. 시계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 길고양이들이 그르렁 거리는 그네들의 이야기 소리. 내 피가 심장으로부터 혈관으로 내달리는 소리 등등. 평소엔 그냥 지나쳐 넘겼을 소리가 자기 전만 되면 신기하게도 귀에 속속들이 박힌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데도 스며든다. 잠들기 전, 영겁처럼 느껴지는 불면의 시간 사이에서 느끼는 나의 고독을 달래주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다. 세상엔 내가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수많은 것 중엔 ‘나’ 역시 포함된다는 것을. 그렇게 스스로 돌아보고 몰랐던 나 자신과 대화하다 보면, 자신이 가야 할 방향뿐 아니라 존재의 고독함을 견딜 힘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불면은 마냥 달갑지 않은 손님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물론 잠을 여러 날 자지 못해 고통받는 불면증 환자에게는 내 말이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잠을 이룰 수 없는 상태가 무조건 나에게 해만 끼치는 건 아니다. 가령, 불면증 환자는 ‘수면 위생’에 대해 교육받는다. 이를 통해 어떠한 활동이나 습관이 내 잠과 나에게 좋고 좋지 않은지를 배울 수 있다. 예컨대 밤늦게 야식을 먹지 않는다던가 과한 운동은 삼가고, 자기 전 따뜻한 물로 샤워한다든가 침대에서 TV나 핸드폰을 보지 않는다던가. 다시 말해 불면은 자신을 부드럽고 소중히 대하는 법을 익히게 하는 스승이기도 하다.     

밥을 먹고 나서 나는 다시 당직실에 누웠다. 그러나 이제는 잠을 간절하게 바라지 않는다. 어둠 속에 홀로 있어도, 난 이 고독을 음미할 것이다. 눈을 감고 좀 더 사색에 잠긴 채, 이 잠 못 이루는 낮을 즐길 것이다. 그리고 불면이 나에게 주는 가르침을 달게 받을 것이다.

불면에 시달리는 나와 같은 친구들에게. 우리는 달리기 위해서 꼭 깨어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불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또한 오래 달리기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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