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원 수업은 매주 강의와 세미나가 각각 있고 코로나로 인해 모두 zoom으로 진행한다. 수업에 임하기 전에는 Learning Sway라고 불리는 온라인 강의 자료와 참고 문헌으로 독학을 하고, 본 수업 및 세미나에는 강의와 여러 개의 group 방에서 하는 분반 토론이 포함되어 있다.
최소 20명에서 100명까지 모여 있는 메인 방에서 group 방으로 이동하라는 팝업창이 뜨고 수락 버튼을 누르면 각 group 방으로 이동하는데 몇 초가 걸린다. 수업은 음소거를 해놓고 듣기만 하면 되지만 분반에서는 본격적으로 발언을 해야 한다. 전쟁에 임하는 전사의 마음으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들어가면 4~6명 정도의 학과 사람들과 토론이 시작된다.
토론 때 늘 겪는 일은 자주 중국인으로 분류되어 중국어 폭격을 받는 것이었다. 이름을 자세히 보면 중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법도 한데 중국 학생들은 동아시아인의 얼굴을 한 나를 중국인으로 생각하고 중국어로 대화를 이어 간다. 대학교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중국에서 유학 생활을 한 적도 있어서 중국어로 토론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애써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니 영어로 토론할 수 있겠냐고 묻곤 한다. 학과에 70%가 중국 학생인 것도 사실이고, 비 중국계 동양인은 나뿐이라 오해하기 쉬울 것은 이해하나 동양인이라면 당연히 중국인일 것이라는 생각을 바로 잡고 싶은 마음에 굳이 한국인임을 밝혔다.
이 상황을 보고 누군가는 “중국인들은 꼭 동양인이 다 자기들뿐인 줄 알더라?”라고 조롱을 할 수도 있다. 이에 당당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교수님이나 튜터, 영국 학생들 조차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나를 중국인으로 알고 대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당연한 듯 중국인으로 분류되는 상황이 자주 있던 터라 의견을 제시할 일이 있을 때마다 “사실 나는 한국인이야.”로 말을 시작했지만 학기가 끝날 때까지 교수님들에게 우리 학과 동양인은 모두 중국인이었다.
정치 관련 수업에서도 대부분 영국,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영국과 친밀한 국가들의 현황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가끔씩 교수님께서 중국에 대해 질문하는 형식이었다. 다른 나라의 예시를 찾아볼 수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현황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고 소재를 준비했다. 애국심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뭐랄까, “여기 한국이란 나라도 있어요.”라고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나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한국인이기 때문에 공유할 수 있는 사례나 생각들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거의 30년을 한국에서 보냈기에 싫든 좋든 생각의 베이스가 한국일 수밖에 없다. 이곳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유럽 중심의 역사를 배우고 아시아를 변방의 역사로 치워 둔 교육을 받아왔다. 내가 준비해 간 예시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이곳 사람들이 중심이라고 믿는 유럽, 서방국가가 아닌 곳에서도 역사는 존재하고 만들어지고 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국가의 소프트 파워를 주제로 토론이 진행되었던 날, 우리나라의 소프트 파워는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 하면 미식과 와인, 영국 하면 유구한 역사와 고상한 차(tea) 문화, 일본 하면 애니메이션과 장인 등 전 세계에서 열광하는 강력한 소프트 파워를 가진 국가들이 있다. 이러한 문화적인 파워는 그 나라의 위상을 높여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나라를 숭배하고 우러러보게 한다. 이는 그 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소프트 파워가 강한 나라는 아니다. 전 세계 사람들 중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한국 하면 떠오르는 강력한 이미지와 상징은 별로 없다. 한 세기도 채 지나기 전에 식민지, 전쟁 국가에서 지금의 한국에 이르기까지 갑작스러운 성장을 한 터라, 문화적 특수성을 가꾸고 세계에 어필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매력 포인트가 무엇인가도 중요하지만 외부적인 요인도 큰 영향을 끼친다. 외모가 출중하고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시기나 트렌드에 맞지 않아 빛을 보지 못하는 연예인이 있듯이 국가의 소프트 파워도 국제 정세의 흐름과 필요성에 따라 세계가 주목하고 말고 가 결정되기도 하다. 예를 들어,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중국, 러시아를 대항할 수 있는 우방 국가였기에 미국, 유럽 지역에서는 일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일본이 다도, 장인 문화나 애니메이션 등 풍부한 문화적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서양에서 더 주목받게 된 데에는 정치적인 요인도 한 몫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도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에서 BTS까지 젊은 층을 중심으로 K-pop이 인지도를 올리고 있고 영화 ‘기생충’, ‘미나리’ 등의 국제 영화제 수상으로 인해 K-movie도 주목 받고 있다. 한국의 소프트 파워에 대해 토론할 때에도 싸이의 ‘강남스타일’에서 BTS까지 K-pop의 영향력과 수준 높은 영화, ‘기생충’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아직은 국가 차원에서의 문화적 영향력보다는 개인의 역량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에서 더 가야 할 길이 멀지만 BTS와 영화 “기생충” 덕분에 두 번째 학기부터는 “저기.. 우선 나는 한국인이야.”를 덜 말해도 되었다. K-pop에, K-무비에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