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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유 Jul 27. 2021

생활비 잔고가 찰랑일 때

매달 30일이면 모바일 계좌에 들어가서 다음 달 기숙사비, 생활비를 송금한다. 작년 10월부터 지금까지 9번의 송금을 하고 나니 가벼워진 통장이 숫자로 보였다. 돈을 보낼 때마다 앞자리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 0 하나가 사라졌다.

돈을 모으는 데에는 2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쓰는 건 순식간이었다. 매달 내는 돈이 어찌나 아깝던지 위장이 쓰려 왔지만 기숙사비를 안 낼 방법도, 밥을 안 먹을 방법도 없었다. 사람은 굳이 어디 나가지 않고 치장을 하지 않고 그냥 숨만 쉬어도 돈이 드는 존재였다.



휴직이나 퇴사를 한 친구들로부터 월급이 없는 삶에 대해 자주 들었다. 돈이 많든 적든 (물론 돈이 아주 많으면 또 다르겠지만) 매달 따박따박 들어오던 수입이 사라지면, 초조해지면서 뭘 살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진다고들 했다. 직장인들은 월급이 마약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월급날 급 텐션이 높아지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겠지만 월급이 주는 그 편안함과 안정감도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수입이 달라졌으니 정확하게는 없어졌으니 소비도 달라져야 (줄어들어야) 했다. 장을 볼 때마다 영수증을 모아 가계부를 써보기로 했으나 쉽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엑셀 파일에 정리하다가 영수증이 책상 옆에 쌓여 가기 시작했다. 쌓아두면 언젠가는 정리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쩌다 바닥에 떨어져도 굳이 줍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일주일이 또 지났을까? 방 청소를 핑계로 영수증을 모두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어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영수증이 없네? 그냥 가계부 쓰지 말자.’

매일 가계부를 쓰는 일은 매일 돈 생각을 하는 일이었다. 있는 돈을 갉아먹는 입장에서 돈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소비를 옥죄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주에 먹은 맥주 한 캔, 과자 한 봉지 등 의식주에 필수적이지 않은 물품들을 소비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싫었다. 내 몸은 맥주와 과자가 필요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것들이 늘어난 뱃살의 주범인 것도 잘 알고 있으나, 마음이 필요로 하는 거라면 이건 필수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정당화 과정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씀씀이를 성찰하며 세세하게 트집 잡는 대신 마지노선을 정해두고 그 금액까지는 쿨하게 보내주자고 결심했다. 매달 정기적으로 나가는 고정 비용인 기숙사비 100만 원을 제외하고 통신비, 식비, 생필품비 등을 30만 원으로 잡았다. 밖에서 외식을 하면 한 끼에 최소 10~15파운드(만 오천 원~2만 원)가 들지만 직접 해 먹으면 한 달에 20만 원이면 괜찮았다. 그 외에 여유 자금을 10만 원에서 최대 100만 원으로 잡았다. 일부러 타이트하게 잡지 않았다. 지폐 한 장 꺼낼 때마다 긴장하고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퍼로 잡아둔 비용 내에서는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은 소비의 자유를 얻었다. 더 이상 숫자와 머리의 감시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마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단 이 금액까지만.”



남들과 달리 걱정 계좌라는 또 다른 계좌를 갖고 사는 나는, 지금 당장 할 걱정이 없으면 걱정 계좌에서 걱정을 인출해서 쓰는 사람이다. 자유를 줬으나 자유를 활용하지 못하고 내 마음은 불다가 놓친 풍선 마냥 매달 훅훅 빠져나가는 돈에 걱정을 얹었다. 이 돈을 더 아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만약 돈을 아끼면 나중에 더 넉넉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진 않을까? 혹시 급하게 큰돈을 써야 할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두어야 하진 않을까? 하는 수없이 많은 “혹시”와 “만약”이 머릿속을 드나들었다.



마음이 걱정 계좌에서 걱정을 인출할 때면 오히려 엑셀 파일을 열어서 유학 생활에 필요한 비용과 그 이후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계산한다. ‘줘도 못 먹니? 쓰라 해도 못 쓰니?’하며 불쌍한 마음을 달래 본다. 정해둔 비용까지 써도 유학 이후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음을 숫자로 확인하고 마음에 새긴다. 계획은 늘 달라지겠지만 이 비용을 쓴다고 해서 미래가 엄청 나빠지거나 불행해지지도, 돈을 아낀다고 갑자기 안정되고 찬란한 미래가 펼쳐지는 것도 아님을 받아들인다.



지금도 인내와 보상, 알뜰함과 플렉스의 사이를 오가며, 가벼워져 가는 계좌와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어머 이건 사야 해.’라는 핑계는 화수분처럼 끊이지 않고 새롭게 생겨난다. 더 아끼려면 더 아낄 수 있는 비용이지만 아끼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들이 분명 있다. 며칠 전에는 친했던 플랫 메이트가 곧 이사를 가게 되어 훠궈 재료를 사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진짜 훠궈 맛을 알려주고 싶어서 참깨 소스며 고추 소스며 이것저것 사다 보니 식비를 약간 초과했다. 그래도 친구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해줄 수 있어서 마음이 뿌듯했다. 무언가를 살 때에도, 사지 않고자 다짐할 때에도 그 선택이 나를 위한 최선임을 기억한다. 수입이 없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알뜰하게 그리고 기분 좋게 잘 쓰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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