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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K Jun 10. 2019

02 디자이너, 일의 형태에 관해

제품 디자인 취업 도전기_02

계약직 디자이너로 일하게 된 계기는 별게 없다. 면접에서 계속 떨어지는 통에 연습이라도 하자 싶어 지원했던 자리가 계약직 자리였고, 면접에서 바로 통과가 되었으며 그 당시 지원했던 정규직 자리는 모두 떨어졌었다.


당시에는 계약직 일을 하며 계속 취업준비를 할 수 있으리라 싶어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특정한 디자인업무에 대한 확신이 없고, 계약직 일이 재미있었다. 사내규정상 정규직 전환이 안 되는 2년 계약기간이 끝나가는 시점에 다시 정규직 공채시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과정에서 디자이너가 하는 일의 형태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01 계약직

회사 입장에서는 매우 편한 고용형태라고 생각한다. 디자이너의 일이란 정규적인 게 아니다. 프로젝트의 긴 기간 동안 마지막 시점에만 디자이너가 동원되는 형태의 업무에 주로 사용되는 형태로 보인다. 혹은 하나의 단기적인 프로젝트가 디자이너와 연관된 경우에 쓰는 방법이다. ( 내 경우에는 좀 특수한 형태였다. 과학기술 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술에 디자인을 입히는 일인데, 애초에 이런 연구소는 인턴계약 고용으로 석사나 학사를 고용해서 일을 시킨다. 그리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학문을 하러 떠난다. 나는 디자인학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학문을 하러 떠날 일은 당분간은 없다. ) 이런 일의 형태를 겪고 난 디자이너는 성장의 속도가 빠르다고 생각한다. 고용의 불안함이란 디자이너로 하여금 다음 고용을 위해 더 노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직급이라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업무를 진행함에 따라 애매한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업무는 고난도인데, 대우는 형편없는 것이다. 그리고 계약직은 2년 이상 고용하지 못하므로 (무기계약직이 아닌 한) 회사로부터 방출되고 난 후 애매한 중고 신입 포지션으로 공채시장에 출사표를 다시 던져야 한다.

 계약직 자리는 공채에서 줄줄이 낙방한 취업준비생에게 찰흙 같은 자리이다. 잘 빚으면 작품이 되지만 제대로 못 빚으면 그냥 굳은 흙덩이가 될 수 있다. 계약직 업무를 포트폴리오로 잘 살릴 수 있다면. 프로젝트를 혼자서도 잘 수행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좋은 성장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2년의 계약직 기간을 잘 보낸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계약직을 한번 한 입장에서 또 다른 계약직으로 가고 싶지는 않다. 고용불안은 정신을 너무도 갉아먹는다.


02 파견직

 인력파견 업체에 등록되어 그 회사가 의뢰받은 일들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히는 겪어보지 않아 모르지만, 대다수의 디자이너들이 추천하지 않았다. 계약직보다 더 얻을 게 없는 자리로 간주되는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겪은 바도 없고, 듣은 바도 없어 섣불리 판단하지는 않으려 한다. 하지만 추천하지 않는다는 건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고 가기엔 이보다 괜찮은 계약직 자리들이 그래도 제법 있다.


03 프리랜서

 대학시절부터 주변 창업동아리나, 지인들로부터 외주를 받는 일이 많았다.  프리랜서의 유혹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지금도 유혹이 있다. 당장은 페이도 제법 괜찮고, 일거리도 찾으면 없지는 않다. 일을 따는 것도 작은 규모에서는 쉽다. 하지만 실력이 따라주지 않고, 프로젝트 경험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이 일은 경력을 좀먹는다.

 디자이너가 디자인에 대한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갑'인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되면, 포트폴리오가 일단 엉망이 된다. 실제로 대학시절 진행했던 외주 업무들은 지금 보면 형편없거나 일관성이 없고 내가 지금 추구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냥 '갑'이 돈을 주고 있고, 나도 이 디자인이 어떻게 되든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싶을 뿐이라 기준 없이 '갑'이 원하는 대로 되기 십상이었다.  어느 정도 프로젝트 경력을 가진 후, 내 디자인에 공감을 하는 '갑'이 찾아오게 해야 포트폴리오도, 디자인 감성도 실력도 좀먹지 않게 된다고 본다. 그저 돈 따라가게 되면 나중에는 월 50만 원에 실제로도 아픈 허리를 숙여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될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2년 전, 소송으로 갈뻔한 UXUI외주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외주는 하고 있지 않고 있다.


04 스튜디오

 대부분 디자인 스튜디오를 성장의 발판으로 생각한다. 실무중심의 학교라고 해야 할까.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취업준비생들의 입장을 아는지 대부분 박봉에 일이 많기로 정평이 나있다. 그리고 규모가 큰 스튜디오는 디자인계에서 유명한 인물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인물'이 되고 싶다. 나는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회사를 학교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런 '인물'들이 가르치는 학교라면 모를까 그들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것이 그들이 되는 길일지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인물들은 대체로 해외 디자인스쿨 석박이 거나 모 회사 출신 디자이너다. 그렇다면 그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는 충족해야 하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기성세대의 커리어 자취가 지금 내 세대에도 맞는 일일까 고민은 든다.  

 스튜디오에 들어가는 일 외에도, 스튜디오를 여는 일도 있다. 나는 외주 프리랜서의 일에 시스템이 적용된 형태로 보고 있다. 시각디자이너를 꿈꿀 때에 한창 봤던 프로파간다의 <GRAPHIC> small studio호는 아직도 소장하고 종종 보고 있다. 그 호에서 다뤘던 스튜디오들은 지금 결코 small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디자인 흐름을 좌우하는 거대 스튜디오들이 되어있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시각 작업물은 그 호에서 다뤘던 스튜디오들의 작업물이다. 그렇게 작은 스튜디오부터 해서 점점 성장시켜나가는 일에도 매력을 느끼고 있다. 이 길은 다소 두렵고 주변의 걱정과 잔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오는 길이다. (돈이 사라지는 소리도 들린다)


05 인하우스

1인 디자이너 체제와 디자인팀 체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인 디자이너로 들어가게 되면, 외롭고 모든 잡무는 다 맡는 반면 박봉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실제로 한 지인은 미팅 때 제품 스케치를 해갔더니 다음날 만화를 그려야 하는 상황에 마주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엔 그림 그리는 얘로 소문이 났는지 고위직 미팅에 들어가 회의 내용 중 나오는 아이디어를 계속 그리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미안해하면서도 할만한 사람이 그 디자이너 밖에 없다면 시킬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지라 해야만 한다. 나도 계약직 1인 디자이너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적이 많았다. 나의 바로 앞전에 일하던 디자이너는 팀 내 카드비용처리까지 전담했었다고 한다.

 디자인 팀을 보유한 경우는 사실 겪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 이러한 형태가 현재 내가 취업을 준비 중인 형태이다. 지인들의 디자인 팀들의 얘기는 자주 듣는다. 어떤 팀은 거의 외주를 주고 핸들링만 하거나, 또 어떤 팀은 디자인을 모르는 팀장에게 디자인을 설명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해 보였다. 이런 이야기들만 들으면 정말 이상적인 형태일까 싶기는 하지만, 나는 모기업 출신 혹은 모기업 모 디자인팀 몇 년 경력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보았다. 세상은 디자이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모른다. 그래서 어디 경력 몇 년 혹은 무슨무슨 프로젝트 참여 어디 출신 같은 것들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좋은 포트폴리오는 좋은 디자이너가 알아본다. 하지만 '좋은' 회사가 좋은 포트폴리오를 알아볼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좋은' 회사는 '좋은' 회사를 알아보기는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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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을 이끌어가면서 나는 디자이너가 인정하는 디자이너보다는 세상이 알아보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그래야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박수를 받기 쉽다. 어쨌든 결국 사람들은 계속 디자인을 잘 모르는 입장을 고수해 갈 것이다. 알아달라고 말하는 것도 이치에 안 맞다. 디자인에 대한 평가기준이 모호하고 주관적일수록 사람들은 디자이너의 출신을 볼 것이고, 경력을 볼 것이다. 그래서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되려 하고 있고, 공채를 준비 중인 것이다. 이런 속내를 숨긴 채로 혁신을 이끌고 싶고 회사의 미래를 이끄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자소서를 쓰는 중이다. 그래서 잘 안 붙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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