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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K Jun 17. 2019

05 제품 디자인과 자소서와 포트폴리오

제품 디자인 취업 도전기 05

지금까지는 디자인에 대한 나의 생각과 취업에 대한 생각을 적었다. 이후에는 좀 더 단계별로 겪었던 일과 드는 생각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01 자소서

자소서를 쓰기 위해 이런저런 컨설팅을 받아보기도 했다. 미리 내가 노리는 회사에 들어간 선배에게 첨삭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취준을 오래 하다 보면, 자소서 쓰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지게 된다. 자소서 단계에서 떨어지는 회사는 어차피 떨어질 회사다. 그렇게 생각하면 심리적으로도 부담이 덜 간다. 처음에는 자소서에 '저는'이라는 말을 빼고 적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그렇게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점점 쓰다 보면 그런 문체에도 익숙해진다. 그리고 뭔가 독특하고 튀어 보이려고 소설처럼 쓰기도 했는데, 이런 일도 이제는 말도 안 됨을 안다. 그냥 뻔한 얘기들을 논리 정연하게 잘 쓰면 된다. 기승전결에 따라 필요한 단어만 써서 쓰면 된다. 묻는 말에만 충실히 대답하면 되고. 그리고 평소에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디자인을 해왔고 할 것인지 생각해두면 술술 써진다. 다만 안 되는 회사는 계속 안 되는 것 같다. 나와 안 맞을게 분명한 회사들이다. 이런 회사에 자소서를 쓰면서 그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에 맞춰서 쓰다 보면 어불성설들이 많아지고 논리의 비약도 많아진다. 그게 나에게는 현대자동차다.

 현대자동차의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과 현대자동차가 그에 부합하는 이유' 항목은 지금까지 도합 4번째 쓰는데도 모르겠다. 매번 내 실제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에 현대자동차가 부합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면 그냥 한 취업준비생이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이 될법한 것과 그에 부합할 법한 이유를 찾게 된다. 그 순간부터 자소서가 '나'를 소개하는 문서가 아닌 '취업준비생 누군가'를 소개하는 문서가 돼버렸다. 당연히 어디서 본듯한 뻔한 자소서가 나오고, 떨어졌다. 이번 시즌 들어서부터 현대자동차의 채용방식이 다소 바뀐 걸로 아는데, 그래도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 도저히 내가 왜 이 회사에 쓰고 있는지를 스스로도 모르겠었다. 그냥 돈을 많이 주는 회사라서? 아니면 여기 들어가면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줄 테니 지원하는 건가? 어쨌든 이런 나의 모습은 현대자동차에서도 굳이 매력을 못 느낄 것이다.  가서 내가 어떤 부분에서 기여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완성된 그림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 디자인을 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직무만으로 봤을 때 , 도대체 뭘 하는 직무인지 모르겠는 경우도 있다. 그 회사를 다니는 선배나 친구한테 물어봐도 자기 회사가 왜 이직무를 냈는지 모르겠다 말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에 자기소개서 항목에서 그 회사에서 직무를 왜선 택했냐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냥 디자이너 채용 공고라 넣었습니다' 말고는 할 말이 없다. 그 회사의 채용공고 중 직무소개 란을 봐도 내용이 없다. 이 경우에는 운에 맡긴다. 이런 걸 만드는 회사고, 여기서 제품 디자인 채용공고를 냈고, 우대사항에 Rhino가 있으니 대충 이런 걸 만들게 시키려나? 이런 식으로 유추해서 쓰는데 헛다리를 짚었음은 탈락 메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직무 설명을 채용공고란에 확실히 쓰지 않으면 운으로 얼추 맞게 쓴 지원자와 진짜로 직무 내용을 알고 쓴 지원자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텐데 왜 이 직무를 선택했냐 보다 차라리 그간 어떤 일을 했는지 묻는 항목을 넣지 싶다.

 사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왜 이 직무를 선택했습니까?"라는 질문은 디자이너 채용에 너무나 맞지 않다. 보통은 고등학교 시절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 진로선택을 결정한 이야기가 회사 지원에는 필요가 없다. 차라리 " 직무수행에 있어서 본인의 강점" 같은 것을 묻는 게 낫다. 대다수 디자이너 취업 준비생으로부터 회사가 디자인에 대한 포부와 큰 뜻을 듣기 원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애초에 디자인에 대한 큰 뜻이 있으면 회사원이 되려고는 안 했겠고, 혹은 그 회사에 들어가서도 언젠가는 나갈 것이니까.  그렇다면 디자인 직무를 선택한 데에 대한 큰 뜻도 밝히기 곤란하고, 고등학교 시절도 이야기도 영양가는 없고, 큰 뜻을 밝히기 어렵다면 결국 현실적인 이유 (돈, 안정성)만 남는다. 회사도 이를 알면서 왜 묻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서로 시간을 아끼려면 서로 뭘 잘하는지 뭘 시키면 되는지만 얘기했으면 좋겠다. 뭐 영업관리나 CS나 교육 등 전공과 무관하게 채용하는 포지션의 경우에서는 이런 질문이 유효하다고 본다. 그러나 전공과 유관한 채용공고에서는 이런 질문이 지원자를 검증하기에는 부적절한 것 같다. 정녕 고등학교 시절 입시 이야기부터 듣고 싶은 게 아니라면.

 

  

02 포트폴리오


어떤 회사는 포트폴리오 규정을 명확히 둔다. 10장 내외, 팀 프로젝트 2점 이상, 개인 프로젝트 2점 이상. 규격을 지정하기도 한다. 이런 제한은 본인들이 검토하기 편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그 회사에서 수천 개 포트폴리오를 받고 있으리라 예상은 된다. 그 과정에서 검토하기 편하게 규정을 주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회사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이 지난 2년간 포트폴리오의 대다수가 돼버린 지금, 개인 프로젝트를 넣는다는 것이 좀 꺼려졌다. 회사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개인 프로젝트인가 팀 프로젝트인가? 디자이너는 나 혼자였는데, 엔지니어링 파트의 팀원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 포트폴리오는 디자인 포트폴리오이다. 그렇다면 개인 프로젝트일까? 팀 프로젝트라 함은 디자이너가 여러 명 있는 프로젝트를 묻는 것인지, 아니면 여러 분야의 팀원들이 모여서 진행한 프로젝트를 묻는 것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요는 이런 규정들을 두는 것이 오히려 몇몇 특수한 케이스들의 성격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지원자를 검증하는 데에 노이즈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팀만 있는 포트폴리오가 싫으면 그냥 떨어뜨리면 된다. 개인만 있는 포트폴리오가 싫으면 떨어뜨리면 된다. 디자인 프로젝트들이 가지는 모호한 성격을 모르는 바 아님에도 이상한 규정들로 학교가 학생 뽑듯 하는 과정들이 진행된다. 그리고 어차피 이렇게 뽑은 포트폴리오들을 또다시 실기시험이나 PT면접 등으로 검증하려 할 것 아닌가.


위는 글로벌 포트폴리오 사이트 Behance의 깃발이다


 어쨌든 자소서와는 다르게 포트폴리오 과정에서 떨어지면, 여러모로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마치 내가 쌓아온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을 부정당하는 느낌이 든다. 뭐 회사의 성향도 있을 수 있고, 회사가 뭔하는 디자인 분야도 있을 수 있으니, 그렇게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떤 회사의 경우는 떨어지면 포트폴리오 전체를 갈아엎고 싶게 만든다. 디자인 취업 준비생이라면 모두 아는 그 회사다. 마치 우리나라 디자인계의 기준이 된 것처럼 모든 디자인과 출신 대학생들이 한 번쯤 지원한다. 그 회사에서 떨어지고 나면, 정말 내 포트폴리오가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다른 회사에 이걸로 지원을 해도 안될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에 나는 포트폴리오를 지금 까지 3번 갈아엎었다. (3번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디자인 실력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 회사에 들어가지 못한 디자이너니까. 그런데 Behance라는 사이트가 있다. 전 세계의 디자이너들이 포트폴리오를 올리는 사이트이다. 여기서 괜찮은 디자인들을 선별해서 깃발을 달아주는 시스템이 있다. 이 깃발은 꽤 받기 어렵다. 내가 올린 디자인이 어느 날 여기서 깃발을 받은 것이 아닌가. 조회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갤러리에 저장되고 있다. 그 순간 디자인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그 회사'의 공개채용이 아닌 디자인을 평가하는 수많은 잣대들과 커리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포트폴리오에도 내 나름의 기준과 관점이 생겼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지금 이 순간에는 정답이다'라는 마인드로 임하고 있다.


 디자인 어워드 수상도 심심찮게 하고 있는 지금, '그 회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긴 하다. 그리고 그 평가가 어찌 되었든 여전히 중요하게는 느껴진다. 한국에서 그곳 만큼 디자이너가 일하기에 그리고 경력을 이어나가기에 좋은 곳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은 그런 '그 회사' 마저 떨어지고, 앞으로 진행해갈 하반기 공채에 실패한다 해도 어딘가에 길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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