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제주의 그라운드, 1루. ep9.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 원아웃
-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루
- 2루
- 3루
다시, 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홈.
안채 옆에 조그마한 별채를 만드는 공사라고 했다.
“카페예요.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마당에서 키운 토마토로 만든 샌드위치를 건네며 미선이 말했다.
“카페 창업이라면…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들지 않나요? 더군다나 여긴 유동인구가 적어서…”
“창업이요? 하여간 손님 정말 웃기다니까.”
우 실장의 진지한 걱정은 또다시 예능이 됐다.
“이름만 카페지 그냥 공간이에요. 손님들이나 이웃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공간이요.
처음 게스트하우스 만들 때부터 생각했던 거예요. 손으로 직접 내려먹을 수 있게 드립 커피도 놓을 거고요. 커피를 마셔도 되고, 자기가 가져온 걸 먹어도 되는. 누구나 편하게 쉴 수 있는 그런 곳?”
설명은 들었지만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공간을 왜 만들며, 대체 돈은 어떻게 번단 말인지. 수익 모델이 없지 않은가. 궁금했지만 또다시 예능인이 될까 싶어 묻지 않았다.
결국 한수 옹을 도와 공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조건은 삼시 세끼 무료 제공. 사실 그동안 우 실장은 은근슬쩍 가족들 사이에 끼어서 이것저것 얻어먹었는데 이번 기회에 정식으로 무상 제공을 받게 된 것이다.
한수 옹은 여전히 쌀쌀맞았다. 눈치껏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둘은 비극 배우처럼 서로 인상을 쓰고 말 한마디 안 하다가 미선만 나타나면 희극 배우가 됐다.
큰 소리를 치긴 했지만 직접 집을 짓는 건 처음이다. 사람의 힘만으로 집 같은 걸 만들 수 있을지 불안했다.
하지만 한수 옹은 제법 노련했다. 혼자 뚝딱뚝딱 진도를 나갔다.
한수 옹은 종종 야구장에도 나왔다. 특별 선수인가 뭐라면서 대접을 받았다. 야구장에 오면 곰 감독과 붙어 시시덕거렸다. 노인 둘이 앉아서 신나게 떠들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일투성이다.
야구단 이름은 ‘병살이지만 괜찮아’라고 했다. 줄여서 병살 야구단.
“이름? 그냥 술 마시면서 이것저것 얘기하다 나온 건데?”
뜻을 물어보니 양승필이 헐헐 웃으며 대답했다.
유치하다, 는 게 우 실장의 소감이었다. 기왕이면 사자성어가 낫지 않나. 임전무퇴 같은.
그래도 연습을 하다 보니 조금씩 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글러브로 공을 잡는 감도 찾았다. 외야에서 수비를 할 때 귀를 쫑긋 세우고 성큼성큼 달려서 공을 잡았다.
하지만 타격은 아직이다. 어쩌다 공을 맞추더라도 공은 빌빌거리며 땅으로 기어갔다. 땅볼머신 양승필 만도 못한 타격이었다.
“힘을 빼라고. 힘을.”
그럴수록 양승필은 더욱 기가 올라 잔소리를 했다.
우 실장이 팀에 합류한 후 첫 시합이 잡혔다. 돌아오는 일요일이었다. 이 곳에 온 뒤 두 번째 경기인 셈이다. 아홉 번의 게임을 다 마치고 홈에 돌아가려면 아직 시간이 좀 필요했다.
상대팀 이름은‘애월 하루방스’라고 했다.
“하루방스?”
“어, 하루방스. 멋있지? 원래 우리가 쓰고 싶었는데 걔네들이 먼저 선수를 쳐 버렸어, 형.”
양승필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긴 병살이지만 괜찮아, 라는 정신과 처방전 같은 이름보다는 하루방스가 낫겠다.
장소는 하루방스의 홈구장. 애월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개그맨 오라방, 유니폼 받아 가.”라봉이 유니폼을 챙겨줬다.
“시합이니까, 챙겨 입어야지.” 눈까지 찡긋했다. “사이즈는 눈대중으로 대충 맞췄는데 맞나 모르겠네.”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유니폼은 전체적으로 흰색 바탕에 짙은 초록색 줄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가슴 편에 조그맣게 병살이지만,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 큰 글씨로 괜찮아, 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글씨체가 독특했다. 직접 손으로 쓴 것 같았다.
“아, 그거. 김만정 오빠가 쓴 거야. 저 오빠 나름 디자이너라고.”
라봉이 유니폼에 새겨진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디자이너라… 저만치 서 있는 김만정을 바라봤다. 김만정은 잔디밭에 멍하니 앉아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김만정의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디자이너보다는 도인 같아 보였다.
“어, 형. 유니폼 받았어?”
양승필과 고병규 커플이 다가왔다.
“등번호 마음에 들어? 매니저 누나가 추천한 건데.”
매니저라면… 미선을 말하는 것 같았다. 미선이? 번호를? 유니폼을 뒤집어서 번호를 확인했다. 초록색으로 우형진이라는 이름이 씌어있고 그 아래 ‘99’라는 숫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99번? 이게 무슨 의미래?”
“글쎄. 나도 모르지. 우익수라서 그런가.”
양승필이 발을 뺐다. 물끄러미 숫자를 쳐다봤다. 애매한 숫자다. 기왕이면 럭키 세븐 같은 걸로 줄 것이지.
“형, 내 번호가 뭔지 알아? 난 럭키 세븐이다, 7번. 고병규는 복 삼. 3번.”
우 실장의 생각을 읽은 듯 양승필이 껄껄거리며 말했다. 갑자기 7과 3의 가치가 하락한 느낌이 들었다.
야구장 이동은 버스로 했다. 운전석에는 한수 옹이 앉아 있었다. 집수리에, 낚시에, 운전까지. 정말 다재다능한 노인이다.
“자, 다들 오셨으면 출발할게요. 우리 야구단 키워드 알죠? 살살, 다치지 않게.”
미선이 버스 앞에서 소리쳤다. 미선도 유니폼을 챙겨 입었다. 바지는 청바지 차림이었다. 모자까지 쓰니 정말 매니저 같이 보였다. 한철과 한별도 따라왔다. 게스트하우스에는 ‘잠시 쉬다 옵니다’라고 성의 없는 메모를 한 장 붙여놨을 뿐이다.
“오늘 시합하는 팀은 어떤 팀이야?”
양승필에게 물었다.
“하루방스? 우리 라이벌이야, 형. 지역 라이벌. 원래 우리랑 막상막하였는데, 요즘 기가 막힌 투수 한 명이 들어와서 말이야, 우리가 밀리고 있어, 형. 그 투수가 떨어지는 볼을 던지는데 아주 예리해.”
양승필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떨어져 봤자 안치면 되지. 볼을 끝까지 보면 된다. 아무리 실력이 줄었어도 선구안은 그대로다. 오늘은 어떻게든 한 방 보여줘야겠다. 우 실장은 주먹을 꼭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