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의 동네서점을 소개합니다
1111 Eighth Avenue between 11th and 12th Streets
우연을 꿈꾸게 하는 곳
무더운 여름날,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자전거를 타러 나가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함께 길을 나섰다. 처음부터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일정이 아니었으나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나는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향하던 곳은 예전 동네였으니 그곳의 서점에 가는 것은 어쩜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목적지는 어느새 파워하우스 온 에잇(powerhouse on 8th)이 되었고 힘들다는 아이 때문에 자전거를 끌고 가던 내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렇게 태양과 사투를 벌이며 도착한 그곳은 어딘가 모르게 싸한 인상을 풍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책방을 홀로 지키고 있던 이가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는지 책방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다행히 책방 앞에는 누군가 놓고 간 중고 책들과 장난감이 한가득이라 아이는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그렇게 20분 정도 기다렸을까, 길 건너편에서 한 여인이 우리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왔다. 서두르지 말라 하면서도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 기다렸다는 듯 서점 안으로 들어간 모녀.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지기 시작하는데......
파워하우스 온 에잇은 2012년에 문을 연 파워하우스 아레나의 새로운 지점으로 파크 슬로프의 브라운 스톤들 사이로 8번 애비뉴, 11번과 12번 스트리트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주위에 자리한 레스토랑과 집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나타나는 반가운 로고. 어느 계절에 찾아도 아늑한 느낌이 드는 건 벽돌로 장식된 벽면 때문일 거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입구를 장식하는 커다란 창문 바로 옆에 뉴욕과 관련된 책이 전시되어 있고 에코백이나 몰스킨 노트 같은 물건들도 판매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메인 공간에는 브루클린에 기반한 작가의 소설을 비롯해 토니 모리슨, 메리 올리버의 에세이처럼 이곳에서 큐레이션 한 다양한 책들이 자리하고 있다.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지만 갈 때마다 책의 위치가 바뀌어 있고 새로운 책이 들어와 있는 걸 봐서 큐레이션에 꽤 신경을 쓰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서점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아동 도서 코너.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 신경을 쓴 주인장의 마음은 아이와 함께 다니는 엄마에게 어필하기 충분하다. 계단을 두 단 걸어 올라가면 나타나는 아이들 코너는 특히 다양한 진열 방식이 인상적인데,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도록 높낮이도 다양하게, 진열 방식도 다양하게 꾸며놓았다. 게다가 갈 때마다 바뀌어 있는 인형들은 매번 귀여운 눈빛으로 나를 유혹하는데 실제로 (내가 가지려고) 이곳에서 입양해온 인형이 두 개나 된다.
브루클린에 기반 한 서점답게 파워하우스 온 에잇은 브루클린 작가들의 책을 적극 홍보한다. 이곳에 가면 예전 집 옆집에 살았던 염혜원 작가의 책을 언제든 볼 수 있다. 진정한 동네 작가에 의한, 동네 작가를 위한 서점인 셈이다. 신간이 나오면 이 서점에서 행사를 갖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수영장 가는 길>, <쌍둥이는 너무 좋아> 등 한국에서도 유명한 염혜원 작가는 서점 행사 때마다 부담이 된다고 하지만 나는 동네 서점에서 그러한 행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부럽다.
이 책방에서는 동네 작가들이 주축이 되는 행사가 1년 내내 열리고 있으니 홈페이지에서 뉴스레터를 신청하면 관련 소식을 받아볼 수 있다. 파워하우스 온 에잇은 책방이자 미니 갤러리(서점 벽 곳곳은 상상력이 넘치는 다양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커뮤니티 공간으로 레드 트라이시클에서 선정한 뉴욕의 10대 인디서점에 당당히 오르기도 했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파워하우스 온 에잇은 덤보에 위치한 유명한 서점 파워하우스 아레나(Powerhouse Arena)의 분점으로 파워하우스 아레나는 파워하우스 북스라는 출판사에서 문을 연 디자인과 사진에 특화된 서점이다. 2020년 11월에는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인더스트리 시티에도 파워하우스 북스토어(파워하우스 @IC)가 문을 열었는데 인더스트리 시티는 첼시마켓처럼 다양한 맛집과 수공예 매장, 아트 전시 이벤트가 열리는 복합 예술공간으로 브루클린의 폐공장 4개 건물을 개조해 상업 공간으로 꾸민 곳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좋아 가끔 찾고 있는 파워하우스 @IC는 공장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린 개방적인 공간에 노란색 포인트 색상이 돋보이는 곳이다. 커다란 창문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반원 모양의 무대는 스토리 타임 같은 행사를 주최하기 위한 공간으로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막아두었지만 원래는 아이들이 편안하게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유아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에 맞는 아동도서는 물론 인근의 라틴커뮤니티를 고려한 듯 스페인어 아동서도 마련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예술, 디자인,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로 출판계에 획을 그은 대니얼 파워와 수잔 퀘니그의 독특한 취향과 열정은 이곳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획일적인 분류 방식에서 벗어나 "Make Believe, " "Coffee Table Beauties, " "Wonderfully Tasty, " "Pre-Instagram, " "For Real, " "Art of Design" 세션으로 분류해 놓은 것. 독특한 큐레이션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푹 빠지게 되는데, 세 지점의 큐레이션은 각 지역의 특성에 맞춰 조금씩 다른 특징을 보인다.
파워하우스 아레나나 파워하우스 @IC에 비하면 파워하우스 온 에잇은 굉장히 작은 서점이지만 나에게는 동네 한가운데 위치한 이 지점이 셋 중 가장 애틋하다. 퀸즈에서 브루클린으로 이사 온 날, 동네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 서점 앞에서 나는 과장을 조금 보태 심장이 멎을 뻔했기 때문이다. 어스름한 밤거리에 은은한 조명을 입고 서 있는 서점이 신기루는 아닌지 눈을 몇 번이나 비볐는지 모르겠다.
8월 초 저녁, 선선했던 저녁 날씨와 어우러진 묘한 불빛에 홀리듯 책방 안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주택가 한가운데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서점이야말로 진정한 동네 서점 아니겠는가. 이런 책방이 있는 동네라면 살만 하겠다고, 아니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혼자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동네 한가운데 버젓이 이런 책방이 운영되고 있다면 이곳은 내가 살고 싶은 곳이 분명했다.
그날 아이와 함께 20분을 기다려 들어간 서점 안은 적당히 시원했고 40분을 걸어오고 20분을 기다린 게 억울한 나는 뭐든 사겠다고 다짐하며 오늘 나와 함께 집에 돌아갈 한 권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내 레이다망에 걸린 분홍색 표지의 책 한 권. 이전에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Severance>였다. 2019년에 나온 책이라 중고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이 책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오늘은 왠지 이 책이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동네책방에 작정하고 들어가지 않는다. 원하는 책을 찾아 돌진할 때도 있지만 책방에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 헤매다가 잊고 있던 뜻밖의 책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이 책을 사러 갔다가 그 옆에 놓인 책을 사게 되고 또 다음번에 와서 살 책을 마음에 담아두고 떠나기도 한다. 그러니 자신의 책방을 찾아온 고객들에게 서점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환대는 고객이 최대한 잘 방황할 수 있도록 책의 미로를 심어두는 것 아닐까. 나라면 그러한 서점에서 기꺼이 헤맬 의양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