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동네책방을 소개합니다
696 Fulton St, Brooklyn, NY, 11217/632 Flatbush Ave, Brookllyn, NY, 11225
열정, 그리고 커뮤니티가 만들어낸 이야기
센터 포 픽션에 간 김에 근처에 위치한 그린라이트 북스토어에 들리지 않을 수 없는 법. 그린라이트 북스토어는 센터 포 픽션이 들어서기 전까지 포트 그린(Fort Greene)의 유일한 동네서점이었다. 몇 년 전 우리 동네에도 새로운 지점이 생기면서 이 지점에는 잘 가지 않았었는데 오늘 모처럼 가보기로 했다.
센터 포 픽션보다 주택가 쪽에 자리한 그린라이트 북스토어. 조금만 걸었을 뿐인데도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역사보존 지구로 지정된 오래된 주택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로컬 중심적인 상권이 아기자기한 느낌을 자아낸다. 2009년 10월, 이 동네에 문을 연 그린라이트 북스토어는 이제 명실상부 브루클린의 대표적인 독립 서점으로 자리 잡았는데, 이 두 서점을 공동 창립한 두 여인의 스토리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이 두 서점의 공동창립자 제시카와 레베카는 랜덤하우스, 펭귄 같은 주요 출판사를 비롯해 보더스, 북 컬처, 맥널리 잭슨, 쓰리 라이브스 등의 서점에서 각자 도서 사업을 배웠다. 2008년 무렵 둘이 합쳐 무려 25년의 경력을 쌓았는데 둘 다 마흔이 채 되기도 전이었다. 2008년, 제시카의 서점 사업계획서가 한 공모전에서 1만 5천 달러의 상금을 거머쥐며 미디어와 현지 커뮤니티의 관심을 받게 된다. 둘은 이 기세를 몰아 서점을 낼 계획을 세우는데, 마침 그 무렵 포트 그린 협회에서 급변하는 이 지역에 서점을 세우자며 그들에게 연락을 취해온다. 설문 조사 결과, 주민들이 이 동네에서 지금 가장 바라는 시설이 서점이었다고 하니 그들에게 이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지 않았을까.
BAM에서 열린 이 서점의 사전 오프닝 파티에는 300명이 넘는 이들이 참석했고 제시카와 레베카는 이 자리에서 둘의 파트너십을 공표했다. 그 후 커뮤니티 지도자들로부터 7만 달러가 넘는 스타트업 자금이 모이자 2009년, 제시카와 레베카는 7명의 직원을 고용하게 된다. 둘은 포트 그린, 686 풀톤 스트리트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물을 임대했고 6월에 시작된 공사는 초가을까지 이어졌다. 지역 주민, 도서 산업, 친구와 가족 모두 나서서 이 공간을 꾸미고 책장을 채우는 데 협조했다. 그리하여 2009년 10월, 그린라이트에서 첫 책이 팔리는 순간, 제시카와 레베카는 자신들이 정말로 책방을 열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후 그린라이트 북스토어는 지역 학교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다양한 북 페어를 개최하고 BAM 오페라 하우스와 하비 시어터에 키오스크를 설치하는 등 지역 사회와의 연계 활동을 이어갔으며 2016년 11월 26일에는 프로스펙스 레퍼트 가든에 새로운 지점을 열었다. 2018년 10월, 두 여인은 포트 그린 지점 옆에 유어스 트룰리(Your Truly)라는 문구점을 열기도 했다. 코로나 때문에 2020년 3월 문을 닫은 뒤 다른 서점들처럼 7월에 다시 문을 연 이곳의 직원 수는 이제 50명에 달한다.
홈페이지에 연도별로 가지런히 정리된 그린라이트 북스토어의 이야기는 열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커뮤니티에 관한 이야기였다. 1993년부터 2020년까지 빼곡히 정리된 역사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개인의 꿈에서 시작된 무언가가 지역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이 동네에 없어서는 안 될 주요 사업으로 뿌리내리기까지 펼쳐졌을 무수한 이야기가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무엇보다도 이 서점을 둘러싼 새로운 이야기는 지금도 매일 쓰이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과거가 되지 않도록 힘쓰는 무수한 이들의 응원과 연대가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오늘은 그곳에서 또 어떠한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감을 안고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쇼윈도의 책들을 한참을 구경하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천장에 매달린 앙증맞은 둥근 조명 여섯 개가 나를 맞이한다. 이곳은 서점의 구조가 특이하다. 다른 서점들처럼 직사각형이 아니라 계산대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길게 길이 나 있고 정면으로는 두 갈래의 길이 뻗어 있다. 두 갈래 길은 끝에서 이어지는데 계산대에서부터 출발해 책장을 따라 책을 구경하다 보면 빙 둘러서 다시 계산대와 만나게 된다.
이곳 역시 다른 책방들처럼 브루클린 출신 작가들의 책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코너가 별도로 있다. 깨알 같은 설명지가 함께 붙어 있는 스탭 선정 코너도 필수. 줌파 라히리의 사인본을 창가에서 본 것 같은데 한참을 찾아봐도 없다. 동네 주민인 줌파 라히리가 직접 와서 사인했을 모습을 떠올리자 꼭 사고 싶었는데 결국 찾지 못해 직원에게 부탁하고 만다.
민트색 표지가 시선을 잡아끄는 한 책 앞에서 멈춰 선 순간, 누군가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저 여자,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편안한 웃음이 매력적인 그 여자가 만남을 약속한 것으로 보이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제시카라고 소개한다. 오호라, 이 책방을 연 바로 그 제시카구나. 사진으로만 봤던 그 멋진 사장님이 바로 내 눈앞에 있다니. 스토리를 알고 가서 그런지 괜히 그녀에게서 광채가 나는 것만 같다.
사장님이 들어왔지만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 버선발로 달려가는 풍경은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같으면 사장님이 출두하셨다는 소식이 깔리면 전 직원이 나와서 호들갑을 떨 텐데. 그녀가 들어오기 전과 후 가게 안의 파장은 큰 변함이 없다. 매니저로 보이는 한 직원에게 오늘 책방은 어떠한지 같은 질문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힐끔 쳐다본다. 보아하니 어딘가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나 보다. 전문 포토그래퍼로 보이는 사람이 책방의 이곳저곳을 찰칵 칼칵 담고 있다.
그 모습에 나도 정신을 차리고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배경으로 찍힐지도 모르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 손에 들린 책은 <How I Became a Tree>. 원래 줌파 라히리의 <Whereabouts>만 사가려 했는데 책을 휙휙 훑으면서 읽다 보니 보니 나무가 되고 싶은 욕망만으로 어떻게 한 권의 책을 썼을지 (나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있는) 사람으로서 무지 궁금해졌다. 첫 문장부터가 강렬하다. "At first it was the underwear. I wanted to become a tree because treees did not wear bras." 감탄이 나온다. 이렇게 첫 문장을 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믿어봐도 되겠지 싶다. 한국 시장에 소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안고 결국 두 권 다 사기로 한다.
서점에서 나온 내가 기쁜 마음으로 향한 곳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문구점. 재미있게도 독립 문구점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큐레이션 된 카드, 노트, 펜, 연필, 기타 글쓰기 도구 등을 판매한다고. 연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 자루는 있다는 Palomino 연필이 보이길래 나도 사 왔다. 책에, 문구까지 오늘 지출이 좀 있으나 기꺼운 지출이다. 문구점의 노트들은 일본에서 그대로 수입하는지 제품 포장지에 일본어가 그대로 쓰여 있다. 아기자기한 선물들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더 머물다가는 지갑에 빨간 불이 켜질까 봐 서둘러 나오며 생각했다. 서점에 문구점까지, 애서가들의 꿈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는 제시카와 레베카는 지금 또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지 않을까. 반짝이는 유행에 기대기보다는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경험과 실력으로 자신의 꿈을 현실화한 그들의 머릿속에서 또 얼마나 근사한 아이디어가 나올지 궁금해진다.
늘 차가 꽉 막혀 있어 내가 별로 선호하지 않는 플랫부쉬 애비뉴(Flatbush Ave)에 자리한 그린라이트 북스토어는 마음만 먹으면 우리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요전 날 아이는 쌩쌩이를 타고 나는 걸어서 서점에 간 적이 있다. 남대문 시장을 연상케 하는 정신없는 도매상들을 지나면서 이런 길에 서점이 있다고? 의문을 가지려는 찰나 내 앞에 나타난 단정한 외관의 서점. 너무 덥고 지쳐서 더 이상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할 것 같을 때 딱 나타난 서점이 반가웠다.
서점 안은 활기가 넘쳤다. 포트 그린에 위치한 본점의 축소판이라고 해야 할까. 기본적인 분위기는 비슷하나 아이들 코너의 비중이 유독 커 보인다. 아이는 눈앞 매대를 가득 메운 화려한 색상의 퍼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퍼즐을 좋아하는 나는 아름다운 그림들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이곳 아동 코너에서는 북스 아 매직이나 센터 포 픽션, 맥널리 잭슨 등에서는 보이지 않는 교재들이 보인다. 우리 집에서 몇 권 있는,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등을 연습하는 구몬 교재이다. 한국의 아이들은 선행학습에 기타 과외도 엄청 한다는데 우리 아이는 뒤쳐지는 것 아닌가 한없이 걱정될 때 사 모은 것들이다. 아이가 원하는 속도를 이해해주자 싶으면서도 또 엄마로서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엄마 마음은 모른 채 아이는 그림책과 퍼즐, 장난감 따위에만 관심을 보이지만.
책에 푹 빠진 아이를 뒤로 하고 엄마인 나는 혼자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에세이 코너로 향한다. 메리 루플의 산문집 <나의 사유 재산>을 만지작 거리다가 메리 올리버의 <Upstream>를 집어 든다. 한국에는 아직 번역되어 나와 있지 않으나 곧 민승남 번역가의 번역본으로 나오겠지 생각하며 책을 펼쳐 든다. 메리 올리버는 자연은 언제나 다름을 시도하고 그 다름은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사소함이라고 노래한다.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인간의 본모습을 탐구한 그녀의 문장에 빠져 잠시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알고 있지만 실천은 어려움을, 책을 읽기는 쉽지만 그걸 내 것으로 소화해 다른 나로 빠져나오는 건 쉽지 않음을 그녀의 문장을 통해 또다시 느낀다.
그녀가 펼쳐놓은 문장들에 빠져 다른 세계로 가 있는 나를 아이가 다그치듯 부른다. 몇 번을 불렀는데 못 들었나 보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다시 말해 사고 싶은 게 있다고) 나를 잡아끄는 아이. 서둘러 상념에서 벗어나 아이가 말하는 곳으로 가보니 퍼즐과 인형의 집 둘 다 마음에 들어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단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묻는 아이. "둘 다 사면 안 되지?" 마음에 드는 책을 보면 두 권 다 사고 싶은 나이기에 아이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다음번에 또 올 구실을 만들어야 하므로 오늘은 하나만 사자고 설득해 계산대로 향한다.
서점을 나서며 생각했다. 나는 이 커뮤니티에 얼마나 깊이 발을 담그고 있을까. 나는 이 서점을 얼마나 아끼고 있을까. 한국어가 모국어인 나는 번역가인 직업 때문에 원서에 대한 거부감은 없지만 둘 중 택하라면 당연히 한국 서점이다. 직관적으로 나에게 꽂히는 활자들로 가득한 서점과 내 쪽에서 먼저 다가가야 하는 서점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내 마음은 반쯤은 한국 서점에, 반쯤은 이곳 브루클린 책방에 걸쳐 있는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몸이 있는 곳은 이곳이므로 우선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책방을 아끼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가끔 이렇게 들려 아마존에서 훨씬 싸게 살 수 있는 아이의 퍼즐이나 장난감을 사는 것, 아마존 상자를 뜯어보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직접 만진 책을 골라 계산대로 들고 갈 때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아이로 키우는 것, 그것이 작은 시작 아닐까, 오늘 산 퍼즐을 놓칠세라 손에 꼭 쥐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