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의 동네책방을 소개합니다
100 N 3rd St, Brooklyn, NY, 11249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헌책방
윌리엄스버그는 나에게 힙한 이들이 모이는 동네, 그리고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로 인식되어 있다.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는지 차를 타고 유대인 인구가 90퍼센트가 넘는 동네를 지나가다가 보면 어느 순간 그들이 보이지 않는 지점이 나타난다. 팬시한 레스토랑과 상점들로 가득한 지역, 그 동네가 관광객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윌리엄스버그"다.
이 번잡한 동네에도 서점은 있으니 맥널리 잭슨 윌리엄스버그 지점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중고 서점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집에서 쉽게 갈 수 있는 "동네책방"들은 아니기에 날 잡아 이 동네에 갈 때면 근방의 서점들을 한꺼번에 둘러보곤 한다. 오늘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북 서그 네이션(Book Thug Nation). 길 건너편에서 중고책이 한가득 담긴 낡은 카트가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연회색 노출 콘크리트에 짙은 청색으로 포인트를 준 깔끔한 외관. 이 멀끔한 외관 안에는 전혀 다른 속이 숨어 있으니 책방 안은 빈티지한 느낌으로 충만하다. 천장에 달린 모빌, 낡은 책장에 붙은 스티커, 책장과 벽면 곳곳에 놓인 사진과 포스터, 한쪽 구석에 자리한 LP판과 레코드, 그리고 방문하는 사람들까지도 전부.
이곳은 양질의 중고서적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자그마한 헌책방으로 주로 소설, 영화, 철학 작품을 다루고 있지만 건축, 디자인, 시, 희곡, 역사, 외국어(한참을 찾아봤는데 한국어 책은 없었다), 그래픽 소설 등도 갖추고 있다. 들어가자마자 마주하는 조그만 평대에는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 같은 유명한 소설들의 빈티지 버전이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이번에 내 눈에 띈 표지는 도레스 레싱의 <다섯 번째 아이>. 핼러윈 분위기에 딱 맞는 표지가 날 좀 어서 데려가라고 한다. 그렇담 안 사갈 수 없지!
2009년 10월, 길거리에서 책을 팔던 네 명의 판매상이 힘을 모아 시작한 북 서그 네이션은 작지만 강한 헌책이다. 헌책방이란 자고로 모르는 작가나 잊고 있던 작가의 작품을 찾아내는 묘미 때문에 방문하는 게 아니겠는가. 내가 집어 든 <다섯 번째 아이>는 First vintage international edition으로 1989년에 출간되었다. 뒤집어보니 8달러라고 쓰여 있다. 나는 7.5달러에 샀으니 그다지 중고 가격은 아니나 이 책의 가치를 생각하면 7.5달러는 거저나 다름없다. 오래된 종이가 풍기는 냄새를 한 번 들이마신 뒤 손에 고이 들고는 다른 책들을 재빨리 스캔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가게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심상치 않다. 한쪽 구석에 놓인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펑키한 음악이 작은 공간을 가득 메우며 책을 마구 사고 싶게 만든다. 서점이면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책장을 샅샅이 훑는 내 고개는 어느새 까딱거리고 있고 무언가를 사고 싶은 욕망이 마구 분출한다. 아무래도 주인장의 전략인가 보다. 쇼핑몰 같은 곳에 가면 일부러 구매욕을 부추기기 위해 빠른 음악을 틀어놓는다던데 그런 의도인가.
시만 판매하는 "위트 앤 시니컬"의 주인장 유희경 시인은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에서 "책이란 물질은 한 권, 한 권 두툼한 조용함을 가지고 있어" "서점 특유의 두꺼운 침묵을 어느 정도 덜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서점의 배경이 될 음악을 고르고 또 고른다. 시집을 판매하는 서점에서 눈 오는 날 디스코 음악이 나오기도 한다면 이러한 동네서점에서 펑키한 음악이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북 서그 네이션은 커뮤니티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10년 넘게 각종 낭독회는 물론 영화 상영, 강연, 주민들의 모임, 퍼포먼스 아트가 이루어지는 등 동네 사랑방처럼 이용되고 있는 것. 이 작은 공간에서 그 많은 일이 이루어진다니 신기할 뿐이다. 한 번은 한 무리의 예술가들이 거대한 책탑을 쌓은 뒤 불을 질러 가게가 연기로 가득해지면서 화재 경보가 울리기도 했다는데, 책방에서 하기에는 다소 위험한 퍼포먼스 아트가 아니었나 싶지만 그만큼 독특한 이 책방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행위 아니었을까.
책을 살 때 껴 주는 책갈피에 적힌 말 또한 인상적이다. 이 책방에서 사간 책을 다 읽거든 자기들에게 다시 팔라고. 그럼 뭐 빌리는 수준 아닌가. 이렇게 장사해도 남는 거 맞나요?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이 책방이 문을 연 지 4년 되었을 당시(2013년) 연 수입이 56,000달러였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내 연봉보다는 높으니 남 걱정은 안 하는 걸로!
내가 헌책방을 찾는 이유는 헌책이 간직한 오래됨이 좋아서다. 나보다도 한참 전에 혹은 나와 같은 해에 이 세상에 태어난 책을 만나면 내가 지나온 40년과 이 책이 지나온 40년이 겹쳐진다. 이 책에는 어떠한 시간이 덧입혀지고 누군가의 흔적이 녹아있을까, 지금 내 손에 들리기까지 이 책은 어떠한 세월을 보내왔을까 생각하다 보면 아득해지고 만다. 그리하여 헌책방에서는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 어쩜 그렇게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잠시라도 기대고 싶어 헌책방을 찾는 건지도 모른다.
헌책이 주는 위로라는 게 있다. 색은 바래져 있고 한 귀퉁이는 접혀 있으며 누군가의 낙서로 가득하지만 아직까지는 쓰임새가 있다는 걸 책은 알려준다. 책에 난 그 같은 상흔은 상처가 아니다. 그건 광속의 시대가 버거운 이들에게 책이 던지는 가만한 위로다. 새로운 책이 쏟아져 나오고 또 잊히는 주기가 짧아질수록 나는 헌책에 애착이 생긴다. 나에게 헌책은 그 자체로 다정함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책방, 특히 헌책방에서는 이어폰을 빼야 한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많은 이들이 이어폰을 낀 채 책을 고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아니다. 나는 책장을 넘길 때 나는 바스락 소리, 책끼리 맞부딛힐 때 나는 사그락 소리, 누군가 매대에 아무렇지도 않게 책을 내려놓을 때 나는 툭 소리까지 전부 듣고 싶다.
코로나가 터진 이후 중고 책방에 들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아무래도 뜸해졌을 것이다. 나 역시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을까 봐 한 동안 중고책을 꺼려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에는 누군가 길에 책을 내어놓아도 섣불리 집어 들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나는 그 이유 때문에 우울했다. 바이러스가 나의 독서 생활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정말 그랬다. 우리 동네에는 사람들이 안 보는 책을 길거리에 내놓는 것이 일상이었고 나에게는 그러한 책들을 오며 가며 주워오는 게 작은 낙이었기에 그것을 할 수 없게 되자 내 삶의 잔재미가 사라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즐거움이었던 것이 이 책방에는 생사가 달린 일이었을 터. 코로나 위기에도 꿋꿋이 버텨낸 이 자그마한 서점이 기특할 뿐이다.
헌책방 특유의 쾌쾌한 냄새와 소리에 푹 빠져 몇 시간이고 있고 싶지만 코로나 때문에 이제 서점들은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을 30분, 혹은 15분 내로 제한하고 있다. 게다가 징징대는 아이가 옆에 있어 오늘은 여기까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음 서점으로 향하기로 한다. 서점 밖으로 나와 또다시 카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아이가 한 마디 한다.
"엄마! 다리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