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의 동네책방을 소개합니다
672 Driggs Ave, Brooklyn, NY, 11211
무언가를 찾고 있다면 이곳은 당신을 위한 곳
분명 못 보던 서점이었다. 검색해보니 올해 4월에 문을 열었다 했다. 이 팬데믹 시국에 문을 연 용감한 책방이라니,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블랙 스프링 북스(Black Spring Books)는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으로 유명한 헨리 밀러의 책 이름을 딴 책방이다. 위치가 기가 막힌데, 바로 헨리 밀러가 어린 시절을 보낸 662 드리그스 애비뉴 바로 옆 건물이다. 이 책방의 운영자는 까만 머리의 러시아계 미국인 시인(이자 작가, 편집자, 교사), 시모나.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1990년 브루클린으로 이민 온 그녀는 뉴욕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책방을 다녀온 뒤 찾아본 정보였고 나는 사전 정보 없이 이 책방을 방문하게 되는데......
우선 책방을 찾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분명 주소 상 이 근처로 뜨는데 도대체 입구가 어디인 거지, 아무리 두리번거려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 눈에 보인 작은 입간판, 거기에는 분명 books라고 쓰여 있었다. 그 간판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은색 문에 그토록 찾던 "Black Spring Books"라는 글씨가 새침하게 쓰여 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연출은 뭐람. 순도 높은 호기심을 강렬하게 느끼며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저쪽 끝에서 까만 머리의 마녀 같은 한 여인이 인사를 건넨다. 운영자가 아니라 아르바이트생일 거야, 생각하며 서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이 서점을 연 장본인이었다!).
낯선 서점에 처음 들어갈 때에는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서점에서 무엇을 취급하는지, 구조는 어떠한지 모든 것이 낯선 나는 우왕좌왕하다가 이내 이 작은 책방에 빠져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입구에 가장 잘 보이는 공간이 온통 중고 시집으로 가득하다. 흠, 시집을 취급하는 곳인가 싶어 반대편 서가를 보니 fiction/nonfiction이라고 쓰여 있다. 내가 바쁜 틈을 타 어디선가 제 수준에 맞는 책을 가져와 읽기 시작하는 아이를 따라가 보니 아동 도서도 꽤 있다.
그런 서점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어색한데 있을수록 나가기 싫어지는 서점. 이 자그마한 서점이 그랬다. 누군가 묘한 마법을 부려놓은 것처럼. 저 까만 머리의 여인은 혹시 마녀가 아닐까. 시를 잘 모르는 나조차 오래된 시집들의 표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영감이 솟구치고 시를 한 편 근사하게 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선 이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Spooky Recs for October" 코너다. 핼러윈을 겨냥한 듯 공포, 스릴러, 호러물을 모아둔 책장이다. 하지만 최신작을 찾는다면 바로 등을 돌려 다시 그 문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 <Alien Contact>, <Howl>, <The Killer of Little Shepherds> 등 낯선 제목의 책이 우리를 맞아줄 테니.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회고록과 <리어왕>, 그리고 칙릿 소설인 <쇼퍼홀릭>이 한 책장 안에 사이좋게 놓여 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Misc. & Cheap"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까 장르 구분 없이 저렴한 가격에 판매할 책을 한 데 모아 놓은 것. 책방이라면 섹션별로 책을 나눠놓을 거라는 나의 기대를 단박에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시도에 나는 조금 들뜨고 만다. 사실은 귀찮아서, 아니면 정리가 덜 되어서 임시로 마련한 코너인지도 모르지만.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시인인 주인이 가장 정성 들여 진열했을 중고 시집들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채 앉아 있다. T. S. 엘리엇의 산문집이 보여 반가우려는 찰나, <Planting the Children>, <A Pleasure Tree> 등 모르는 시인들의 시집이 홍수처럼 나를 덮친다. 영어 시집들 앞에 까막눈이 된 채 잠시 우왕좌왕하지만 나는 ㄷ자 모양의 이 서가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초반본이 대부분인 나이 많은 시집들이 시 무지렁이인 나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줄 것만 같다.
주인이 걸어놓은 마법인 듯 아닌 듯한 묘한 아우라에서 겨우 빠져나와 소설/비소설 코너를 잠시 서성이다가 용기를 내어 주인장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떼어본다. 그런데 그쪽으로 갈수록 장르 구분이 모호해진다. 마구잡이로 이곳저곳에 쌓아둔 책들은 아직 정리가 안 된 건가, 나름의 콘셉트인가. 누운 상태로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면 꼭 맨 아래칸에 놓인 책을 꺼내고 싶은 못된 욕구가 발동하지만 오늘은 선뜻 손이 뻗어지지 않는다.
휘, 한 바퀴 돌아 입구 반대편 쪽으로 가본다. 아동도서 옆에 건축, 디자인 서적이 보이고 그 옆 책장에는 콜레트 자서전에서부터 온갖 과학서와 비평서들도 보인다. 그리고 저 꼭대기 칸 한편에는 누군가 기부한 듯 비교적 최근작이자 나에게도 있는 <Vanishing Half>가 네 권이나 꽂혀 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먼지가 풀풀 나는 누런 책들 사이에서 삐죽이 존재를 드러내는 그 책은 뭔가 잘못된 곳에 와 있는 것만 같다.
나가려고 몸을 트는데 아동도서 쪽 창가를 장식하고 있는 <Child Make Terrible Pets>라는 책이 피식 웃음을 자아낸다. 아무래도 이 서점에서 뭔가를 사서 들고 가려면 내공이 좀 필요할 듯하다.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하거나. 이런 서점이라면 비 오는 날 와도 좋겠다 싶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다는 핑계를 대며 오랫동안 비비적거리면 좋을 테니.
주인장인 시모나는 늘 서점을 열고 싶은 욕망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헨리 밀러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 바로 옆에 위치한 이 공간을 우연히 발견했던 것. 코로나 사태로 많은 서점이 문을 닫았지만 이는 한편으로 그녀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선사하기도 했는데, 명패조차 달려있지 않은 이 건물을 본 뒤 그녀는 이곳에 책방을 열어야만 한다고, 이건 운명이라고 생각했단다. 팬데믹 가운데 책방 문을 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그녀이지만 이미 자신이 운영하는 책방에 푹 빠진 듯하다.
책방 안쪽 끝에 달린 문을 열고 나가면 옥외 공간에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다. 그날은 소심해서 물어보지 못했으나 나중에 찾아보니 거기에 앉아서 커피도 마시고 와인도 마시고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다음번에 가면 꼭 해봐야지. 와인 한 모금에 책 한 권, 내가 바라는 나의 미래상 아닌가.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시모나는 도시의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을 둘 다 과감 없이 보여주는 밀러를 좋아한다며 그의 책을 읽을 때 살아 있는 기분이라 했다.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비싼 월세 때문에 맨해튼에서 브루클린으로 쫓겨났다고 생각하지만 브루클린에는 언제나 예술가들이 있었다고. 그녀에게 브루클린에 대한 밀러의 묘사는 그 어떠한 역사서보다 값지다.
이 매력적인 주인장은 에피파니 잡지의 편집자이자 다수의 책을 출간한 작가로 그림까지 잘 그리는 만능꾼이다. 그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이곳을 또 방문하고만 싶어 진다. 집 근처에 있었다면 매일같이 찾아가 그녀를 괴롭혔을지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부러운 건 나만의 색깔로 채운 자신만의 책방을 갖고 있다는 것. 이 주인장은 자신을 정말 잘 아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이제 막 문을 연 이 책방이 앞으로 어떠한 공간으로 거듭날지 기대된다. 위기 속에 탄생한 만큼 앞으로 그 어떠한 위기가 닥쳐도 버틸 수 있기를 책방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간절히 바란다. 한 사람의 꿈에서 시작되었지만 커뮤니티에 단단히 뿌리내리는 책방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을 후세대에 잘 전달하는 가교로 꿋꿋이 남아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다음에 가면 그녀에게 "위트 앤 시니컬"이나 "책방 이듬"처럼 시인들이 운영하는 한국 서점 이야기도 해줘야겠다. 그러고 보니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만 나타나는 "책방 이듬"과 두리번거리며 찾게 되는 "블랙 스프링 북스"는 어쩐지 비슷한 것만 같다. 그곳을 찾는 고객들의 표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집에 와서 주인장의 색깔이 그대로 녹아든 블랙 앤 화이트 톤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니 따스한 문구가 나를 반긴다.
If you wait long enough every book becomes useful.
어디선가 푹 끓인 사골곰탕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마녀 같은 주인장이 뒤뜰 한 편에서 수프를 끓이고 있는 건 아닌지.
"블랙 스프링 북스는 중고 서점이자 자칭 문학 소셜 클럽입니다. 중고 서적을 판매하며 주로 초판본과 희귀본을 취급합니다. 무슨 책을 찾는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찾고 있다면 이곳은 당신을 위한 곳입니다."
의미심장한 문장들이 나를 더욱 홀린다. 기부도 받는다고 하니 다음번에는 한국 시집을 몇 권 들고 찾아가 볼까 한다. 시를 잘 모르는 나이지만 그녀에게 더 잘 설명해주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애정을 갖고 시를 읽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시작되는 읽기도 있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