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다시 갑니다.

: 붓으로 쓰는 글씨든, 삶이든, 한 획 한 획 정성스럽게.

by 이막내작가

30여 년만이다.

한 손 가득 들어오는 커다랗고 검은 먹을 쥐고 벼루 위에 원을 그리고 그렸다. 그렇게 묵을 갈았다. 어깨가 아파올 즈음 먹물에 점성이 생겼다. 먹을 벼루 가장자리에 걸쳐놓고 화선지 한 장을 펼쳤다. 부드러운 면이 앞면, 조금 더 거친 면이 뒷면.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 화선지 표면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보았다. 어! 이상하다. 양쪽이 다 똑같다... 화선지의 앞면을 쉽게 찾지 못하고 헤맸다. 지난 30년 동안 손끝 살갗이 두꺼워지고 감각도 무뎌진 모양이다. 종이의 이쪽저쪽을 몇 번 문질러보다가 그나마 더 부드러운 것 같은 쪽이 위를 향하도록 화선지를 폈다. 화선지의 한쪽 끝을 문진(종이를 눌러서 붙잡아주는 용도의 막대기)으로 고정했다. 자, 이제 준비가 다 됐나?


오래전, 나의 서예 선생님은 붓을 쥐고서 첫 획을 긋기 전에 준비동작처럼 '스읍-'하는 소리를 냈다. 마치 수영 선수가 출발대에서 다이빙 직전 마지막 숨을 한껏 들이 마쉬는 것처럼. 준비를 마친 선생님의 손이 획을 하나씩 긋는 대로, 나는 스승의 손 아래에서 붓을 가볍게 쥐고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학년이 두 번 바뀔 동안 한글서예를 배웠다. 적지 않은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저 몸에 밴 어떤 느낌만 남아 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붓을 다루는 법부터 배웠다. 종이 위에 글씨를 써 나가는 동안 붓의 결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직선을 그리고, 세모를 그리고, ㄹ자를 연속으로 써 내려가고, 동그라미를 두 획으로 나누어 그렸다. 같은 것을 수없이 그렸다. 2시간이 훌쩍 흘렀고, 어깨가 빠질 듯 아팠다. 빽빽하게 채워진 화선지가 여러 장 쌓였다. 사용한 화선지를 한 줌 뭉쳐 쥐고 벼루에 남아 있는 먹물을 훔쳤다. 자리를 정리하고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동사무소를 나왔다. 아니, '행복복지센터'를 나왔다.


내가 기억하는 서예는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모든 동작이 차분하다. 느리고 섬세하다. 붓을 씻은 물(거의 맹물에 가까운)을 벼루에 붓고, 먹을 손에 쥐고서 천천히 한쪽 방향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듯 먹을 간다. 그렇게 한참을 갈다 보면 어느새 먹물이 끈끈하고 진해진다. 붓에 먹물을 골고루 묻혔다가 적당히 덜어낸 후 종이 위에 한 획, 한 획 천천히 그어나간다. 팔이 책상과 수평이 되도록 팔꿈치를 들고서, 팔 전체로 글씨를 쓴다. 글자의 한 획 한 획을 그토록 정성스럽게 쓰는 행위는 뭐라 말하기 힘든 경험이었다. 그 진득한 행위가 좋았다. 성격이 급한 편이었던 나에게 오히려 잘 맞았다. 붓을 쥐고 있는 시간만큼 나를 다듬는 기분이었다.


서예를 다시 배우고 싶다 생각한 것은 오래전이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선뜻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다 12주 간의 소설 합평 수업이 끝나고, 그 빈자리에 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서예교실을 끼워 넣었다. 정신없이 달려왔던 마음을 차분하게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장을 만들고,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를 글자로 꺼내는 일이 즐거웠다. 그 무언가를 잘 담아내기에 소설이 가장 멋진 틀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다 알게 된 섬뜩한 사실이 있는데, 소설을 쓰겠다는 사람이 소설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것. 소설에 대해, 내가 쓰고자 하는 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야 했다.


붓을 쥐고 직선 하나를 주욱 그었다. 한참 전부터 옆에 서서 지켜보시던 나이 지긋하신 학우님이 "옳지.", "잘했어.", "그렇지." 추임새를 넣어주신다. 그 앞에 그렸던 직선은 아니었나 보다. 그 앞의 앞에 그렸던 직선도 아니었었나 보다. 스무 번째 즈음 그린 직선이었을 거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한자를 멋지게 쓰는 모습으로 보아, 꽤 오랫동안 서예를 하신 분 같았다. 그렇게 짐작했다. 나이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그분 눈에는 내 모습이 병아리처럼 보였겠지. 고작 획 하나 긋는데,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신다. 칭찬이 반가웠다. 잘하고 있다는 말이 듣고 싶어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그 작은 한 마디에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도 좋겠다는 용기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다시 시작하지. 가다 보면 도착할 테지. 갈다 보면 어느새 진해진 먹물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가면 되지. 획이 모여 글자가 되고, 글자가 모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문단이 되고, 문단이 모여 글이 되지. 내가 쓰려는 글의 한 글자 한 글자도, 한 글자의 한 획 한 획도 이렇게 정성스럽게 써야지. 부드러운 앞면과 거친 뒷면을 분별하는 세심한 감각도 길러야지. 그렇게 진득하고 보드라운 시선으로 삶을 들여다봐야지. 오래오래 그래야지. 오늘은 오늘의 한 획을 그어야지.


두 번째 서예수업을 준비하면서 팔토시를 샀다. 혹시나 먹물이 옷에 튀지 않게 막을 용도로 주문했는데, 주문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나 보다. 검은색이 아닌, 하얀색 바탕에 연보라색 꽃이 그려진 리넨(여름에 사용하는 얇은 천) 소재의 팔토시가 와버렸다. 어쩌나... 서예 할 때 쓰기에는 너무 연약하고 예쁘다. 심지어 손목에 잔주름도 잡혀 있다. 쓸데없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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