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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닢channip Aug 26. 2020

짧고 굵은 러시아의 기억

상트페테르부르크 2박 3일

 핀란드와 러시아는 역사적으로도 현재까지도 얽히고 얽힌 관계인데, 헬싱키에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걸리는 기차 시간이 3시간 반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 서쪽 끝 핀란드 동부에 “카렐리야”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는데 현재 대부분 러시아 영역이지만 핀란드에 조금 더 가까운 문화권이라고 하겠다. 정확히는 카렐리야 고유의 문화가 있다고 해야겠다. 카렐리야식 의복도 있고, 여러 가지로 지역적 정체성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러시아 지배기에 카렐리야는 핀란드로 인식되었고 카렐리야를 언급하는 것으로도 민족주의적인 정서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북간도를 말하는 거랄까. 20세기 무렵 작곡가 시벨리우스가 카렐리야 소곡을 지어 민족의 얼을 고취 시키려고 노력하였고, 대중들의 냉담한 반응에 이를 추려, '카렐리야 서곡 Karelia Overture'과, 세 곡을 모아 '카렐리야 모음곡 Karelia Suite'를 발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과 1차,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두 국가 간 경계가 카렐리야를 중심으로 분쟁을 지속하다가 복잡한 정치적 이유로 러시아에 대부분 귀속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핀란드 역에서 내렸을 때.

 1세기 전을 상상하며 기차를 타고 내린 핀란드 역은 생각보다는 황량했다. 규모가 큰 것도 아니었고, 분주한 사람들과 깨끗하지 않은 공기가 마치 이곳이 러시아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레닌이 1917년 오랜 망명 생활을 끝내고 볼셰비키 혁명을 시작하는 출발점이었던 핀란드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의 여정은 낭만적이진 않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글을 쓰다가 오랜만에 집에 있던 '핀란드 역까지' 책이라도 들추어볼까 싶었는데, 이사를 오면서 버렸다고 하니 아무래도 그 황량한 느낌으로 감상을 그쳐야겠다. 현실은 인터넷이 안 되어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통신사를 찾아 겨우 유심을 사고, 러시아의 우버인 얀덱스(Yandex)를 불러서 호텔로 부랴부랴 출발했다. 내가 어디에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물러 여행하는 처지라는 것을 인식하게 했다.

지휘자 게르기예프와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는 마린스키가 아니라 여러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인 특별 공연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 일은 밤에는 공연 보기, 낮에는 교회와 관광지, 미술관 다니기. 매우 심플했다. 낮에 돌아다니고 저녁에 공연으로 마무리. 그렇게 2박 3일을 보냈다. 저녁에 공연을 볼 마린스키 극장을 걸어 다닐 수 있는 네바강 지류에 위치한 허름한 4성 호텔(?)에 짐을 풀고, 혼자서 꽉 찬 일정을 소화했다. 숙소에서 레스토랑을 추천받아 이디엇 Idiot이라는 식당에서 홀로 점심 코스를 먹었는데, 식전주와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서 대략 우리 돈으로 2만 원 정도 나왔던 듯싶다. '핀란드였다면 메인 요리 하나밖에 주문을 못 했을 텐데'라며 다시 러시아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고, 점심부터 서비스로 받은 보드카 한 잔을 쭉 들이키며 마더 로씨야를 한 번 더 외쳤다. 이외에도 샐러드, 비트로 만든 러시아 전통 수프인 보르쉬, 러시아 만두 펠메니(이날 먹었던 듯싶다) 등등 저녁까지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공연은 오후 4시였고, 대중교통도 애매하고 택시를 타기에는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두 시간 정도를 남기고 공연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거리 상으로는 30 분이 채 안 걸리는 장소였는데, 마린스키 콘서트장의 입구를 찾는 일은 꽤나 애를 먹었다. 마린스키 공연장은 온라인으로 미리 예매할 때도 조금 주의해야 할 것이, 보통 샹들리에가 화려하고 초록색으로 건물이 칠해진 오래된 전통의 마린스키 구관에서 발레, 오페라 등을 공연하는데, 예매를 잘 못하면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마린스키 신관에서 볼 수 있다. 또한 클래식 콘서트홀은 이 두 건물과 조금은 거리가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기에 늦지 않게 도착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콘서트홀에 잘 도착하고도 전면이 공사 중인 콘서트홀의 입구가 어딘지 몰라서 뒷문으로 돌아가려다가, 결국에는 사람들을 따라 잘 찾았다.

성 이삭 성당. 내부가 더 화려하다.

 러시아를 여행한 날짜를 정한 것은 전적으로 공연 날짜에 맞추어 2박 3일을 잡은 것이었는데, 클래식 공연이 마음에 들면 발레나 오페라가 마음에 안 들고,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내가 교환학생으로서 참석하고 싶은 행사들이 있었다. 클래식 공연을 고른 기준은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가' 였는데, 그가 '세헤라자데'를 지휘하면서 머리가 산발이 되도록 보여주는 열정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땀에 젖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프로그램이 1부는 슈베르트의 '거인 the Great'을, 2부는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이라 조금은 차분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 그렇다고 해서 공연이 별로였다는 것은 아니고 되려 수준이 상당했다. 특별히 평화를 주제로 연주하는 피스 오케스트라라는, 이벤트성으로 꾸려지는 세계 각지의 연주자들이 모인 악단이라 개개인의 능력도 흠잡을 곳 없이 깔끔했고, 장소가 주는 분위기가 있어 기분도 좋아졌다. 

에르미타주 미술관.

 둘째 날에는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저녁에는 마린스키 공연장에서 오페라 '사드코'를 관람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구관과 신관이 나뉘어 있는데, 초록색 건물이 구관, 광장 가운데 기둥을 중심으로 반대편의 노란 파스텔 톤의 신관이 있다. 티켓을 살 때 괜히 줄이 긴 구관에서 사지 말고, 미리 예매를 하거나 신관으로 가서 쾌적하게 먼저 즐기다가 구관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신관에서 통합권을 사면 더 좋지만, 학생들은 구관과 신관 각각의 티켓 오피스에서 무료 티켓을 받아야 하니 신관에서 먼저 편히 즐기고 구관에서 티켓 경쟁에 돌입하는 것이 좋다. 여기에는 꼼수가 있으니, 티켓을 미리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밖에서 줄을 서지 않아도 들여보내게 해 주어 신관 티켓을 흔들면서 티켓이 있다는 식으로 하면 들여 보내주고, 그 안의 티켓 오피스에서 국제 학생증을 보여주고 무료 티켓을 받고 입장하면 된다. 이때 안 된다고 돌려보내는 사람이 있으면 반대쪽 입구로 들어가서 남들 우르르 몰려들 때 타이밍 봐서 똑같이 내부로 진입하여(아니면 그냥 안에서 버티고 있다가) 티켓을 받을 수 있다. 나는 메인 게이트만 있는 줄 알고 이런 꼼수를 썼는데, 다른 입구를 통해서 가면 얼마나 기다릴지, 빨리 들어갈 수 있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만약 대학생이 아니라면 그냥 외부의 티켓 기계에서든, 신관에서든 통합권을 사는 것이 좋다(아니, 사야 한다!) 그러면 이런 불편함을 감수 안 하고 그냥 들어간다. 

 에르미타주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방문한다면 개인적으로 신관을 추천한다. 티켓과 대기줄 때문에도 있지만, 신관에서 우리가 잘 아는 모네, 반 고흐, 고갱 등의 그림을 잘 볼 수 있고 개관 시간에 가면 특히나 쾌적하다. 이러한 결론은 프랑스를 다녀온 친구들에게 '루브르 vs 오르세'를 물어보면 십중팔구 오르세가 낫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단언할 수 있다. 내가 갔을 때는 러시아 미술품 수집가가 모은 거의 대표적인 19세기 이후의 그림들, 에르미타주 소장품과 모스크바의 푸쉬킨 미술관 소장품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신관에서는 모네의 풍경화와 고갱의 작품도 인상적이지만 하이라이트는 수많은 피카소 다음에 등장하는 마티스 그림이 아닐까 싶다. 생각보다 크고, 푸른빛에 홀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구관의 대표적 작품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가 있지만 구관은 워낙 사람도 많고 복잡하여 길을 잃기 쉽고 작품들도 생소하다. 물론 나처럼 렘브란트 작품을 쿨하게 건너뛰고도 온 시간을 불교 벽화와 이슬람 미술에 할애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구관도 상당히 매력적일 것이다. 아니면 러시아 미술을 느끼고 싶거나.

마린스키 공연장에서 본 오페라 사드코

 저녁 시간이 되어 오페라 '사드코'를 보러 마린스키 공연장에 갔다. 나름 비싼 돈을 주고 1층에 앉아 보았지만(그래 봤자 발레 3층 티켓보다 절반 이상 싸다) 오페라는 실망적이었다. 실수도 많고, 가사를 까먹어서 당황한 주연배우의 표정이란! 후에 들어보니, 마린스키는 원래 발레가 전통의 강호이고 오페라는 그에 비하면 한참 수준 이하라고 한다. 그렇지만 공연장은 아름답고 품위 있었다. 기념품은 살 것은 없었지만. 공연을 볼 때 민망했던 일화가 있었는데, 내가 이날 초록색 재킷을 입고 자태를 꾸미고 공연장에 갔다. 그런데 마린스키 건물 벽에서 보이듯이 민트빛, 초록색이 마린스키의 상징색이라 그런지 공연장 내의 직원 분들이 초록 재킷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서로 살짝 당황하여 '나는 관람객이야'라는 시그널을 보내야 했다. 

 셋째 날에는 넵스키 대로 근처에 위치한 성당들을 방문하고, 거리를 걸으며 여정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길 중간에 노어노문학과 친구가 추천해준 '푸시킨'이라는 카페에서 한국의 찹쌀 꽈배기와 같은 도넛을 먹을 수 있었다. 커피 대신 차를 시키려는데, 할머니들과 영어가 잘 안 통해서 티 Tea, 테 Thé? 라며 소통을 시도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차 Cha?'였다. 그렇다. 러시아어로도 차는 차였다. 또 혼자 피식 웃으면서 디저트를 먹었고 핀란드에 돌아갈 시간을 생각했다. 숙소로 다시 돌아가서 얀덱스를 불러, 핀란드 역에서 헬싱키 중앙역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다. 여권 검사를 하고 역 내에서 좋아 보이는 보드카 한 병을 사고서 기차를 타니, 다시 맑은 공기가 있는 핀란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https://youtu.be/SQNymNaTr-Y

위에서 언급한 게르기예프가 지휘한 세헤라자데

https://youtu.be/YBpN9-XOIqQ

오페라 사드코의 대표곡 '인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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