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배웠다.
IT업계에서 솔루션 하나 만들고 사라지는 게 비일비재 하다는 건 알지만
나는 개발자나 기획자가 아니기 때문에 솔루션을 만들 일도, 없앨 일도 많지 않다.
데이터 관련 회사를 다니면서 생겨버린 나의 오랜 꿈은
사람들이 코딩을 할 줄 몰라도 이용할 수 있는 데이터 분석 솔루션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빅데이터니, 코딩이니, 4차산업혁명이니 하는 말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고
환상을 심어주기 훨씬 이전부터 회사를 다녔고, 또 데이터를 분석하는 업무를 했으므로
코딩을 잘 한다고 데이터 분석을 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코딩, 코딩 떠들게 되면
반대로 코딩이 자동화되는 시점이 올 수 있다는 걸 암시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걸 알기 쉽게 얘기하면 노코딩(No-Coding)이라는 말로 퉁 칠 수도 있다.
물론 노코딩 시대가 온다고 해도 여전히 코딩을 할 줄 알고 모르고는 적지 않은 차이가 될 수 있겠지만.
어쨋든 코딩을 배우기 어려운 사람들도 데이터 분석을 경험할 수 있는 솔루션을 만들고 싶었고
나는 개발자나 기획자가 아니므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몇 년 만에 런칭하는 기쁨을 맞았다.
몇 년이 걸린 건 부침이 심해서였다. 개발에 들어간 시간보다 기획 방향과 필요성을 문서화하고
설득하고 또 문서화하고 설득하는 시간들이 길었으며, 그보다 더는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시간들이 더 길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솔루션은 그렇게 만들어지나 보다.
혹시 내가 그린 솔루션이 많은 사람들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다면 달랐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탄생한 솔루션은 100%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나아갈 길을 생각하니 기대도 되고 설레기도 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믿었던 이 솔루션은 나에게,
더 먼 미래를 그릴 수 있는 도화지 같은 것이었다.
앞으로 남은 반이, 지금까지 걸어 온 시간의 몇 배가 걸린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관련된 사람들이 "아직 반이 남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작이 반인 줄 알았던 그 솔루션은
사실은 반이 아니라 10% 정도였음을 깨닫게 하면서 사라졌다.
사라지는데 어떠한 설득도 필요하지 않았다. 성과를 진단하지도 않았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유를 알고 있고 납득이 가는 면도 있지만, 그래도 아쉽다.
무엇이 남았을까. 그 긴 몇 년의 시간동안 나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그래도 배웠다. 곱씹어 보니 몇 가지가 되었다.
기획서를 작성하고 완성하는 걸 부족하나마 곁눈질로 담았고
개발 과정에서 어떠한 문제들이 생기는지 미미하나마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건 내가 꿈꾸던 게 사실은 누군가를 설득할만큼 그렇게 구체적이지도
또 그렇게 매력적이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얘기를, 내 논리를, 내 꿈을 이해해 줄 곳이 어딘가에는 있을거야!
그렇게라도 스스로 위로 받고 싶지만,
가장 날 몰라주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결국 사업이 된다는 걸 나는 안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섣불리 스스로 위로하지는 말자.
중간 중간에 화가나고 남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더라도 곱씹자.
꽤 많이 곱씹으면 처음에 맛보지 못했던 육즙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최대한 많이 남고 최대한 많이 배울 수 있도록
곱씹어서 풍파였던 과정들을 기억에 남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