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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보컬 Feb 23. 2024

Prologue: 취향, 그 낭만에 대하여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오래전 개봉한 영화 중에 '타인의 취향'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었다. 개봉 당시에 관람한 적도 없는 영화이지만 그 제목만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꽤나 강한 인상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과연 영화가 이야기하려 했던 '타인의 취향'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해당 작품에서 그것이 음식이나 문화에 대한 개인의 선호도를 가리켜서 말했던 것인지, 한 사람이 꽁꽁 싸매듯이 감추어둔 성적 페티시를 이야기했던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꽤나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유독 사람들의 타인의 취향에 관한 관심이나 오지랖이 꽤나 심한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유행과 메인스트림에서 벗어난 테이스트를 폄하하거나 우려하는 경향은 현재에는 비교적 예전에 비해 줄어들긴 했으나,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록은 사탄의 음악이었고 애니메이션은 오타쿠들의 전유물로 치부되었으며, 게임은 공부와 현실을 등한시한 사회적 루저들을 중독되게 만드는 사회악이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문화를 소비하는 이들의 나이에 대한 선입견은 어떠한가? 30대가 되고 40대가 넘으면 '애들이나 좋아할 법한' 것들에 대해서는 응당 졸업해야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라는 사회의 무언의 압박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일과 육아에 전념하는 '가정적인 어른'이라면 음악은 짬날 때 멜론 차트 Top 100에 있는 것이나 가끔 듣는 것이 미덕이며 시간과 금전적 여유가 된다면 K-Pop 아이돌에게 투자하는 삼촌팬, 누나팬을 자처하는 것이 국내 문화산업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듯한 미디어의 유도와 흐름이 느껴질 때면 왠지 서글프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중년 혹은 노년이 되면 클래식을 들으며 독서를 하는 것이 교양 있는 어르신이 되는 길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트롯트를 들으며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낸 트롯트 유망주들을 응원해 주는 것이 소탈한 어른의 미덕인 것처럼 강요하는 듯한 '보이지 않는 손'이 감지될 때도 있다. 명절에는 온 가족이 모여 극장에서 개봉한 역사적 위인에 대한 작품을 감상하거나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다룬 감동적인 영화를 보는 것이 단란한 가족의 이벤트이고, 구석에서 게임이나 하고 조카들에게 아끼는 피규어를 뺏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아직도 결혼 안 한' 삼촌은 집안의 천덕꾸러기일 뿐이다.

삼촌은 분노한다…

록음악과 애니메이션, 호러영화를 좋아하고 상대적으로 유행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도가 적었던 나는 또래 무리에서 미묘하게 항상 독특한 사람 취급을 받아왔던 것 같다. 친구라고 할 만한 이들이 적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내가 좋아하는 컨텐츠에 관해 깊은 대화를 하거나 공감을 나누는 일은 인생 전체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밴드를 시작하고 자칭 뮤지션들과 소위 말하는 매니아를 자처하는 이들과 어울리면 뭔가 다를 것 같기도 했으나 프랑스의 예술영화나 극단적인 고어도를 자랑하는 아방가르드한 공포물, 2분이 넘는 기타 솔로나 기계적으로 완벽한 연주의 합을 보여주는 음악 혹은 아티스트의 혼란한 내면세계가 담긴 개성적인 곡만이 진정한 예술임을 설파하는 이들 사이에서 나의 취향은 얄팍하고 후지다는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심지어 그나마 비슷한 취향을 갖고 어울렸던 친구들도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면 응당 돌아오는 대답은 십중팔구 "너, 아직도 그런 거 좋아하는구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거 좋아하는' 상태로 살아왔기에 결국 본업은 아니어도 적당히 밴드도 하고 글도 쓰면서 살고 있으니 나름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이기에 주변 사람들 중에는 다양한 나이와 위치의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요 근래에는 치열하게 공부나 일에 집중하고 육아와 현실에 치여 살다가 이제야 여유를 찾은 사람들이 꽤나 보인다. 그런 이들을 오랜만에 만났을 때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 "너, 아직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재미있게 사는구나. 난 정작 시간이 나긴 했는데 이제 뭘 해야 재미있게 할 수 있을지를 잘 모르겠어."인 것 같다. 사실 이런 분들에게 쉽사리 뭔가를 추천해 주거나 조언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갑작스럽게 어떤 것을 보여주거나 들려준다고 해서 이들이 거기에 큰 감흥을 얻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마치 중년의 어른에게 "당신, 내일 선 보고 바로 다음 주에 결혼하십시오."라고 통보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취향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고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 투자와 본인의 의지와 모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여정을 거친 사람이 뒤늦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았을 때에 진정한 감동과 보람이 온다는 것이 내가 가진 취향에 대한 철학이다.

다행히 요즘의 환경은 뒤늦게라도 이러한 취향을 기르기에는 더없이 좋고 풍요로운 편이라고 생각한다. 넷플릭스나 쿠팡플레이 같은 OTT 서비스와 애플뮤직이나 멜론 같은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의 데이터베이스는 꽤나 충실하게 잘 갖추어진 편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10~15초 안에 본인이 궁금했던 작품을 바로 찾고 감상할 수 있다. 친구나 주변 지인이 짧게 언급한 어떤 아티스트나 작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유튜브나 나무위키를 검색하면 그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습득할 수도 있다. 뒤늦게 게임에 관심이 생긴 이들도 예전에 비해 훨씬 입문하기가 쉬워지기도 했다. 20년 전이라면 견문을 넓히고 자신만의 문화적 소양을 쌓는 데에 1년이 넘게 걸릴 만한 일들을 이제는 1달 만에 처리할 수도 있는 세상이 된 것 같다. 무슨 만화영화 보고 음악 듣고 게임하는 데에 그런 노력까지 기울여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본인만의 취향을 찾고 어떤 컨텐츠에 애정을 갖고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고 자신의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창하게 써놓긴 했지만 앞으로 내가 쓸 글들은 아마도 읽는 이의 취향을 기르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냥 내가 스스로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두서없이 이야기하게 될 것이며 심하게는 잡스러운 헛소리로 치부될 수도 있는 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누군가가 내가 쓴 글을 읽고 "저 사람이 쓴 거 보니까 묘하게 재밌어 보이네? 나도 한 번 체크해 볼까?"라거나 "나도 뭔가 내가 좋아할 만한 걸 좀 찾아볼까?"라는 생각이 되고 동기부여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이다. 그로 인해 자신의 취향을 넓히고 기르고, 영감을 받고 인생에 대한 낭만을 갖는다면 뭔가 사는 것이 조금은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 가지 오해를 방지하자면, 앞서 언급했던 K-Pop 아이돌이나 트롯트에 대한 뜨거운 열기나 소위 말하는 '국뽕' 영화들, 유행하는 것들에 대한 선호 등에 대해 나는 뚜렷한 반감을 갖고 있지도 않고, 그것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 나 역시 남들이 좋아하는 유행을 따라가다가 내 취향의 폭이 넓어지기도 했고, K-Pop이나 역사를 다룬 국내 영화 중에도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분야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고 그것에 열정을 갖게 된다면 그 역시 기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거기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폄하하거나 별종 취급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고, 누군가가 자신의 선호도와 무관하게 유행만을 열정적으로 좇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허탈한 생각에 잠기는 것만은 피하게 해주고 싶을 뿐이다.


예전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낭만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낭만 없이 밥 먹는 데에만 치중하는 인생은 너무 팍팍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으로 내가 쓸 이야기들이 글을 읽는 당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풍요롭고 즐겁게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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