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diohead - OK Computer
마블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에서 우주의 각기 다른 행성과 은하계에서 온 외계인들로 구성된 캐릭터들이 듣는 음악은 지구인 피터 퀼의 플레이리스트이다. 세계관 상에서 그다지 강한 힘을 가지지 않은 지구임에도 전 우주인이 음악만큼은 지구의 것을 선호한다는 것을 볼 때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신적 존재 카오루의 "음악은 리린(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의 극치야."라는 말이 이해가 될 듯도 하다. 그 플레이리스트에서 시리즈의 최종장인 3편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음악이 바로 Radiohead의 'Creep'이다. 밴드의 1집 앨범 'Pablo Honey'에 수록된 이 곡은 90년대에 살아본 이들이라면 안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의 모던 록 명곡이며, 한 때 조금이라도 우수에 젖은 인디 록 매니아였다면 혼자만의 감성에 취할 때 꼭 틀어놓던 노래였다.
나 역시 청소년기에 'Creep'을 처음 듣고 푹 빠져버렸고, 이들의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음반점에서 당시에 이들 앨범 중에 표지가 가장 예뻤던, 그리고 가장 많이 팔고 있던 앨범인 'OK Computer'를 구매했다. 그리고 기대감에 집에서 재생을 시작했고, 앨범이 끝날 무렵 내가 느낀 것은 만족감이 아니라 깊은 당혹감과 실망이었다. 당시 나의 이 음반에 대한 감상은 심한 말로 하면 그냥 '뭔가에 취한 사람의 술주정' 같다고 생각했다. 반복적이기만 한 단조로운 멜로디, 뜬금없는 타이밍에 터지는 디스토션과 굉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징징대는 듯한 기묘한 창법 때문에 전혀 다시 듣고 싶지가 않았다. 당시 수록곡 중에 나름 제일 잘 알려져 있었던 트랙인 'Exit Music (For A Film)'의 경우에는 듣고 나서 일종의 불쾌감마저 들었고, 인터류드 트랙인 'Fitter Happier'를 듣고서는 '하아, 이 자식들 날로 먹네.'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에 학교 친구에게 이 앨범을 듣고 느낀 실망감, 그 난해함에 대한 나의 당혹감에 대해 얘기했더니 그 친구는 "그래? 그다음 앨범에 비하면 'OK Computer'는 진짜 대중적이고 그나마 락 같은데?"라는 충격적인 대답을 내게 해주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잔뜩 겁을 먹고 들은 이들의 다음 앨범 'Kid A'는 또 걱정했던 거에 비해 꽤나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음반이었다. 결국 'OK Computer'에 대한 나의 실망감은 그 기대치가 'Creep' 한 곡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고, 'Kid A'를 들을 무렵에는 이미 Sigur Ros나 Arcade Fire 같이 정형성에서 벗어나 있는 팀들의 음악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잘못된 것은 앨범이 아니라 나의 인식과 기대치였던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다시 듣는 'OK Computer'는 명성에 걸맞게 위대한 앨범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이 앨범이 영향을 미친 밴드는 Muse, Arctic Monkeys부터 Sigur Ros나 심지어 The 1975까지도 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앨범이 밴드의 음악적 족적에서 갖는 존재감이 듣는 이에 따라 다소 다를 수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음반이 라디오헤드가 록밴드로서의 정체성을 마지막으로 유지한 앨범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반면에 다른 이들은 이 앨범을 기점으로 라디오헤드는 이미 록밴드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만큼 이 앨범은 경계선상에 놓여있고, 어떠한 한 가지의 수식어로 음반을 표현하기에는 쉽지가 않다.
일단 사운드나 구성 상으로는 의외로 단순한 록 앨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음반이다. 컴퓨터 사운드나 FX가 많이 들어가지도 않고 기존의 기타와 베이스, 드럼의 구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조용한 부분에서는 어쿠스틱한 느낌의 생톤 기타를, 터지는 부분에서는 디스토션 굉음을 터뜨리며 곡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도 기존 록의 문법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곡의 전개에 있어서는 기존 록밴드 음악의 기승전결에서 많이 벗어나는데, 이 앨범의 곡 전개를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기기기기기전결에 가깝다. 마치 테런스 맬릭의 영화처럼 이 음반의 곡들은 다소 단조롭고 지루할 수 있는 반복을 랜덤한 느낌으로 쭉 쌓아 올리다가 마지막에 급작스럽게 방향을 틀면서 곡의 종반부에 터뜨리는 식으로 듣는 이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기존의 음악 작법에만 길들여져 있는 청자에게는 당혹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OK Computer'는 귀에 꽂히는 멜로디에 초점을 둔 음반이 아니다. 곡의 선율만 놓고 본다면 전작인 'The Bends'의 'High and Dry', 'Black Star', 'Fake Plastic Trees' 같은 노래들이 훨씬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이 앨범의 핵심 요소는 멜로디와 악기들이 조금씩 쌓이면서 형성하는 일종의 사운드스케이프에 있다. 소리를 어떻게 쌓고 그것을 활용하고 어떤 방식으로 터뜨리느냐가 이 앨범이 강점을 보이는 부분이다. 그 어떤 곡보다도 나른하고 후반부에는 웬만한 메탈 이상으로 강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곡 'Paranoid Android', 기괴한 흥겨움이 돋보이는 트랙 'Electitioneering' 같은 트랙에서 이런 장점이 극대화되며, 라디오헤드 특유의 감성과 아름다운 선율에 목말라하는 청자에게도 'Let Down'이나 'No Surprises' 같은 아기자기한 느낌의 곡들도 중간중간 숨통을 트이게 해 준다.
취향과 무관하게 그 어떤 결과물을 내놓아도 납득이 되고 용서가 되는 뮤지션들이 있는데, 아마 그 방면의 대표주자가 Radiohead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앨범을 기점으로 많은 록밴드들의 작법에 변화가 있었고, 새로운 록의 흐름을 열어주었다고 본다. 록의 생명력을 연장시키기 위해 록밴드의 작법을 파괴해 버린 위대한 앨범, Radiohead의 'OK computer'를 다시 꺼내서 들어볼 타이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