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mashing Pumkins - Rotten Apples
"너는 너바나 파야? 스매싱 펌킨스 파야?" 중고등학생 시절, 음악 좀 듣는다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꼭 나오던 질문이다. 나는 사실 둘 중에는 무조건 너바나 쪽이었는데, 이는 'Nevermind'가 나를 락에 입문시켜 준 두 앨범 중 하나이기도 했고(나머지 하나는 Green Day의 'Dookie' 앨범이다), 무엇보다 스매싱 펌킨스가 나의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메탈과 모던 록을 넘나드는 하이브리드한 매력, 수려한 멜로디 속 이따금 터지는 하드한 그루브와 리프, 뭔가 팀 버튼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기괴한 비주얼과 이미지 등 나의 취향을 저격할 만한 요소가 충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밴드는 어린 시절 그냥 뭔가가 나와 맞지 않았다.
메탈과 모던 록의 이상적인 조합을 기대하고 들은 첫 곡이 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꽤나 갈렸던 'Ava Adore'였고, 베이시스트가 진짜 섹시하다는 친구의 얘기를 듣고 기대하고 보았다가 Darcy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외모에 실망하기도 했던 등(친구가 말한 건 후반부에 합류한 Melissa Auf der Maur였다) 밴드를 접하는 순서가 뭔가 잘못되어서일 수도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그냥 밴드의 프론트맨 빌리 코건의 음색이 내 취향에 맞지 않아서였다고 생각한다. 뭔가 'Adore' 앨범 활동 당시의 험악한(?) 비주얼과는 다르게 앵앵거리는 목소리에서 오는 위화감이 상당했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느낌의 매력을 주는 커트 코베인의 음색에 비해 당시에 내게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쨌든 그래도 그렇게 좋은 밴드라니 한 번쯤은 파고들어 봐야겠다.'라는 생각으로 고1 때 이들의 베스트 앨범인 'Rotten Apples'를 구매했다. 사실 단순한 베스트 앨범이라기보다는 당시에 해체를 선언했던 이들이 팬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송별 선물에 가까운 음반인데, 기존에 발매된 앨범 중 가장 인기를 끈 곡들이 수록되어 있는 점 외에도 미발표곡과 각종 B-side 곡까지 꽉 채운 나름대로 알찬 패키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음반을 통해 이들의 명곡인 'Today', '1979', 'Tonight Tonight' 같은 명곡을 접할 수 있었고, 바로 이들의 팬이 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왜 스매싱 펌킨스라는 팀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인기 있는 밴드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 매니아들에게 있어 보통 베스트 앨범이라 하면 그 가치가 높지 않은 편이다. 일단은 베스트 앨범 중 상당수가 아티스트의 의사와 무관하게 음반사에서 무작정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발매하는 경우가 있고, 그럴 경우 팬으로서 도의적인 의무로 그 앨범을 보이콧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일단은 곡의 실질적인 가치나 팬들의 애정보다는 싱글컷 여부가 수록곡 선정에 더 큰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해당 뮤지션의 매력을 오히려 온전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음반에 따라 컨셉이 수시로 바뀌는 뮤지션의 경우에는 오히려 그 들쑥날쑥한 분위기 때문에 개별의 음반을 들을 때에 비해 베스트 앨범을 들었을 때 감흥이 크게 떨어지는 경우가 있을 때도 있다. 결국 베스트 앨범이란 아티스트의 본래의 의도대로 청자가 음악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뮤지션과 리스너 사이의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베스트 앨범이 별로라고 생각되지는 않으며, 해당 뮤지션에 대한 입문용 앨범으로는 오히려 그 가치를 크게 발하는 경우도 있는데 스매싱 펌킨스의 'Rotten Apples'는 상대적으로 그 가치가 굉장히 훌륭한 음반이라고 생각한다. 각 수록곡들이 나온 시기는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앨범의 흐름에는 끊김이 없고,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밴드의 명곡을 가장 효율적으로 접할 수 있는 친근한 접근성을 갖는 동시에 코어한 팬들에게는 이들의 B-side를 비교적 훌륭한 퀄리티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추가 콘텐츠를 제공해 주기에 양측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너바나와 스매싱 펌킨스가 씬의 최강자 자리를 두고 라이벌전을 벌이던 90년대 이후로 약 30년이 지난 지금, 커트 코베인은 죽어서 전설을 남겼으나 빌리 코건은 다소 유들유들해진 중년의 록커가 되었다. 이따금 스매싱 펌킨스와 너바나의 시대에 대한 회상 인터뷰가 매체에 실릴 때도 있는데, 의외로 요즘 "그냥 한 때 반짝했던 왕년의 노쇠한 록커가 어디서 함부로 너바나에 비비고 있어?"라는 반응들이 꽤 많이 보인다. 비록 재결성 이후의 스매싱 펌킨스의 음반에 이전만큼의 반짝임은 덜할지언정 한 때 팬들의 추앙을 받던 이들이 뭣도 모르는 네티즌들에게 조롱과 비아냥을 들어야 한다니 씁쓸할 따름이다. 적어도 90년대 스매싱 펌킨스는 한 때 정말로 너바나의 라이벌이었던 것이 맞고, 이들의 해체는 당시 비슷한 시기에 해산했던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과 함께 음악 팬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던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따금 별다른 이유 없이 '1979'이 엄청나게 듣고 싶을 때가 있으니, 지금 또 이 앨범을 틀며 이들의 영광의 시기를 잠시 둘러보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