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거나, 싫거나
이생의 노력만으로는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 우리의 삶이기에 인도에서는 파괴의 신, 쉬바(Śiva)의 화신인 크리슈나(Krishna)가 인간, 아르주나(Arjuna)에게 행위를 실천할 뿐,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평정심 개발을 강조했는지도 모르겠다. 바가왓기따에서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고요한 마음의 행위는 업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인도인들의 성경, 바가왓기따의 핵심 메시지이다. 사람들은 평온한 마음의 상태일 때 더 긍정적이게 마련이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미생물을 볼 때는 현미경을 사용하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는 망원경을 사용한다. 보고자 하는 대상에 따라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똑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어떤 도구를 쓰는가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사실이 아닌 것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보는가에 따라서도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우리의 몸 또한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이 또한 원자에 불과하다. 사람의 몸도 원자들의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서 그곳에 모여 있는 원자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모이게 만든 조건이 없이 지면 다시 흩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영원한 것은 없으므로 모든 물체는 조건이 맞아서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있다고 말한다. 인연(因緣)은 콩 심은 곳에 콩 나고 팥 심은 곳에 팥 난다는 속담처럼 원인이 있기에 결과로써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조건 즉 원인이 없으면 결과(果:phala)도 없다는 것이 불교의 연기(緣起)이다.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는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은 예외 없는 공정한 자연의 법칙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因:hetu)과 조건(緣:pratyaya)의 상호관계로 발생한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독립적이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불교적 관점으로 사물이나 현상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하는 현상에서 보이는 관계의 변화일 뿐, 원인과 조건이 있으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한번쯤 주목하게 하는 시크릿, 끌어당김은 법칙은 현재 주어진 것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상상하라는 것이다. 긍정적인 마음에 머묾으로써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관건은 순수한 마음의 상태이다. 사실 이 긍정의 마음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라는 결과가 아니더라도 긍정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말해야 한다. 불교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법칙은 이생 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미국의 심리학자 존 바그(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는 의식은 무의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적 사고의 내용들이 무의식에 저장된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리지만 지금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무의식은 현재의 표면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신이 심었던 부정성이 여전히 잠재의식에 남아 있다면 표면의식의 확신과 긍정 만으로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다.
인간이라는 실체와 자연을 동일시 한 스피노자의 말처럼 내일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긍정이란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려는 노력 일 것이다. 자연의 일부 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결과는 신의 영역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다면 고통은 반복될 것이다. 이천 오백 년 전 “싯타르따 고따마”는 고통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제시했다.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치달려 왔고 보지 못하였다. 집 짓는 자를 찾으면서 괴로운 생은 거듭되었다. 집 짓는 자여 이제 그대는 보였구나. 그대 다시는 집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다. 마음은 업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는 부서져버렸다.”(각묵스님 번역)
생성과 멸망이 아니라, 태어남과 죽음의 수없는 반복으로부터 벗어나는 오도의 순간을 붓다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나 붓다도 아라한(부처님이 제시한 사성제(四聖諦)의 팔정도(八正道)의 이치를 깨달아 해탈한 성자(聖者)를 지칭하는 말)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은 피할 수가 없다. 설령 한두 번 의지로써 일들이 뜻대로 전개되었다 하더라도 좌절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살아가면서 원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원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불만족스럽고 괴로운 상황들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주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