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거나, 싫거나
명상 지도하는 역할을 맡은 이후 명상을 하는 사람들로 부터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단연 부부싸움을 하는가 였다. 누가 처음이 최고와 통한다고 했던가? 사람들이 히말라야 산맥의 최고봉이 에베레스트라는 것을 알고 있듯, 첫 번째 사람에 대한 궁금함은 기대로 이어지기 쉬운 것 같다.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사람이 최상의 기량을 가진 사람 이어서만이 아니라 노력과 행운도 뒤따랐을 것이다. 최초라고 해서 최고라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당연히 부부싸움을 한다. 살아온 성장 배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다. 자명한 사실이다. 굳이 맞추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 다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자주 알게 되고, 가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의아해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어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다만 싸웠다고 해서 우리 부부가 조화롭지 못하다고 자책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물을, 어떠한 상황을 이해하는 관점이 같아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 질문의 이면에는 싸움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것 같다. 우리사회 전반에서 싸움하지 않는 부부에 대한 환상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평화의 반대말이 전쟁 이듯 조화로운 것은 싸움하지 않는다는 공식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같이 살기 위한 싸움은 서로를 만나는 건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싸움 뒤에 서로가 원수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의견에 다른 사람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고 있는 행위여야 하고,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누구나 다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는 때로 잘못할 수도 있고 그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 아니 용서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가끔은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순간 망설이게 된다. 성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는 기준인가? 순간 질문의 이면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나의 마음은 분주해진다.
불교에서 말하는 4종류의 성자 중 예류과(預流果), 또는 수다원과(須陀洹果), 압류과(入流果), 등으로 불리고 있는 첫 번째인 과위를 성취하면 자아가 있다는 견해에서 벗어나고, 의례의식과 계율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수행(법)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린다고 한다. 욕망이 남아 있는 세계인 욕계의 마음을 극복하고 고귀한 마음의 혈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인간의 종성(種姓/gotrabhū)이 바뀌어 성자가 된다. 두 번째인 한번만 다시 태어난다는 일래과(一來果) 또는 사다함과(斯陀含果)가 되면 감각적 욕망과 악의가 옅어지는데, 이러한 성자들도 화를 내지만 화를 내는 마음이 너무 빨리 일어나고 사라져서 그 순간을 평범한 우리들은 포착할 수 없다고 한다. 감각적 욕망과 악의는 세 번째의 다시는 인간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불환과(不還果) 또는 아나함과(阿那含果)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알려져 있다. 윤회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네 번째는 아라한(阿羅漢)이라고 부른다.
사실 싸움을 할 때의 관건은 화를 내고 있느냐 있지 않은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화를 내지 않고 싸움을 할 수 있다면 사실 이미 싸움이 아니다. 복싱이나 태권도, 유도 등과 같은 경기에서는 이기기 위해서 싸우지만 화가 나거나 흥분하는 쪽이 패하기가 쉽다. 사실 부부싸움은 승부의 문제가 아니기에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이 있을 터이다. 화가 날 수도 있고 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부싸움을 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모두 화를 내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화를 내게 되면 나의 의견을 잘 전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할 수 도 없게 된다. 화가 분노와 악의로 치달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 다 나쁜 사람도 아니다.
싸우기가 싫다고 한다면 싫어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볼 일이다. 결국 그 이면에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싸워서라도 소통하고 싶은 열정이 있다면 싸움은 소통의 기술이 된다. 싸움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나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음을 견뎌 내지 못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집요하게 밀어붙이려는 사람에 대하여 미움이 일어나는 마음의 문제이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거나 동의를 받지 못할 경우 누구의 의견이든 더 적합하고 바람직해 보이더라도 채택되지 않을 수도 있다. 벌어지는 일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아야만 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양보할 수도 있고 기다릴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도 있는 사람이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서로의 다름을 견해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따라서 마음의 색깔도 다를 수밖에 없다. 부부라 하더라도 영원히 소통이 불가능한 영역도 있을 것이다. 서로의 다름과 견해를 파악하고 대처할 일이지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다는 알려진 연예인이나 유명인사 부부들의 인터뷰를 접할 때 그들은 싸움이 아니라 의견을 어떻게 제시하고 절충하는지에 대한 기술이 터득되어 있으리라 짐작한다.
인간의 능력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난다. 부부간에도 재능에 있어 차이가 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열등한 사람을 무시하는 부부싸움이라면 실력을 겨루어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게임이 되어 버릴 것이다. 한 가족 내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피나는 투쟁의 가족사가 전개될 수도 있다.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주고 보완하며 의지하는 부부라고 한다면 싸워도 괜찮다. 화해할 수 있기 때문에. 건전한 관계의 토대가 된다면 부부싸움도 소통을 위한 대화의 방법으로 승화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