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거나, 싫거나
철이 든 것도 이제 겨우 몇 년이 된 것 같다는 초등학생 아이가 둘이 있는 부모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남을 사랑한다는 건 정말로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일상생활에서 남을 나처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정말로 그것이 가능한지, 단지 관찰하고 지켜봄으로써 마음의 고요를 얻게 된다면 사랑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인지를 묻는다.
가족들이 사랑스럽지만 자신에게 맘에 드는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만 더 사랑스럽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별로 사랑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사랑스럽다가도 피곤할 때는 그렇지 않아서, 그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한다. 더러는 싫은 경우도 있어서 이런 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를 반문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원망과 분노에 빠져 있을 때, 그래서 그 영향이 주변에 미치게 될 때, 자신의 마음 상태가 여유가 있을 때는 "참 딱하다. 마음에 폭풍이 이는데 그것을 어찌할 바를 모르는구나."라고 의식적으로 지켜보기도 하지만, 어제는 악의를 띤 건지 아닌 건지 애매한 동료의 말 한마디에, 아직도 휘둘리는 자신을 보며 속상한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명상을 삶의 부분 부분에 적용하면서 평정심을 지키리라 결심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시험은 다시 찾아와 불쑥불쑥 자신에게 와 부딪치고 있어서, 어떻게 이미 배우고 익히고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점령당할 수 있을까를 곱씹었다고 한다.
읽어야 할 책도 많고 해야 할 일이 많음에 감사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필요한 것들도 배우고 하루하루 열심히 비교적 성실하게 살아왔노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감기에 걸려 앓아눕듯 가야 할 멀고 먼 앞길에 캄캄해진다는 것이다. 이만 하면 많이 성장했다고 여겨지다가도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맨 살을 드러내는 취약한 시간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흔들리고 경직된다고 한다. 종종 중요한 일에 있어 결정하지 못하고 방치하거나 선택을 미루어 버리는 자신의 모습에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고 한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초기에 혼란스러워하는 지점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명상은 어떠한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자신의 현재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것일 뿐, 마음에 들지 않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일어나는 마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어떠한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괜찮다고 허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아니면 회피했던 내부의 다양한 마음들을 목격하고 지켜보는 작업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어서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한다. 왜 이러한 마음이 나에게 일어나는지를 반문한다면 결코 마음은 쉴 수가 없다.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내려놓는 연습이 중요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연습을 반복함으로써 새로운 생각이나 마음이 강화된다.
이때 한 가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마음이 쉴 때 개인의 의식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다양한 이미지들이 드러나기도 하고, 또는 색깔, 빛, 신화적 상징이나 종교적 신의 이미지 등이 떠오르는데, 이러한 현상을 명상의 성취로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심리학에서는 인류가 공통적인 심상을 집단무의식 차원에서 공유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라는 인간의 의식의 원형(archtype)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나타나는 것 또한 내부에 쌓여 있었던 이미지 일 뿐이다. 경험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명상 중에 경험하게 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명상 중에는 신체가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새로운 경험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정답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아니라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 명상을 "Art of living", 즉 삶의 예술, 또는 삶의 기술로 표현한다. 서양 심리학자 중에는 "Art of Loving"을 이야기한 사람도 있다. 사랑도 기술이 필요하다.
명상을 통해 마음의 균형을 잡고, 마음을 정화해서 보다 긍정적인 영향을 주변에 끼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삶의 예술이리라. 하지만 이게 그렇게 쉽지는 않다. 저절로 사랑의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에 연습이 필요하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지쳐있어 타인을 수용할 수 없을 때는 우선 자신을 먼저 돌보아야 한다.
내 마음의 평정을 지키고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도, 관계 속에는 돌부처처럼 가만히만 있어서도 안 되고, 상황과 대상에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 반응과 대응은 다르지만, 경계가 모호해지곤 한다. 나는 좋은 의도로 시도했는데도, 상대는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하기도 한다. 상대의 오해를 풀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땐 잠자코 있는 수밖에 없다.
정말로 위기 상황이라면 진심을 토로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방법도 완벽을 기대하기보다는, 좀 부족하고 어설퍼도 자신에게 관용적일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고 해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도 기술이 필요하다. 기술이 숙달되어서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때까지는 부족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힘든 상황을 마치 TV속 드라마 보듯이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지켜볼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커질 때 사랑의 마음을 쓰면 된다.
나도 잘 하진 못하지만, 관계는 플러스, 마이너스의 전자가 서로 밀치고 당기는 것과 유사한 것 같다. 또 다른 각도 하나는 우리네 삶이 '사랑'이라는 관점만 있는 게 아니어서, 혹시 내 삶의 원동력과 지표가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라고 부추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이든, 속단을 내리지 말고, 관찰자 시점을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남들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삶의 본질 중의 하나는 덧없고, 부질없이 흔들리는 것, 흔들리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좋거나 싫거나 그 존재들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사랑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