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maine Tailleferre (1892-1983)
내가 결혼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을 내면 보수적인 부모님은 ‘해보지도 않고 겁부터 낸다.’며 우선 결혼부터 하라는 압력을 행사하신다.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부모님의 세대는 왜 그렇게 생각하신 것인지 궁금하지만 그들에게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답은 ‘우선 하고 봐.’라는 말뿐이다.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참 관심이 많다. 그리고 결혼에 대한 생각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현대의 사람들이 결혼과 관련하여 ‘비혼’ ‘졸혼’ ‘딩크족’등 다양한 언어들을 만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여성의 입장에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남성에게 유리한 제도라는 의견을 피력하면 육아를 돕고 가정일을 도우며 고군분투하는 남성들에게 박탈감을 안겨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남성들이 가정일과 육아를 ‘돕는다.’는 표현을 쓸 것이 아니라 당연히 ‘같이 해야 하는 일.’로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한 지인들을 보면서 누군가와 깊은 교감을 나누고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결정을 내릴 수 것 자체가 축복이라고 생각했다가도 출산, 육아의 영역이 전적으로 여성에게 맡겨지면서 여성의 커리어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 나는 마음이 다시 갈대같이 흔들린다.
가정을 꾸리고 그것에 의미를 두는 여성들도 많지만 자신의 자아실현에 의미를 두는 여성이 경력단절과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면 결혼이 과거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여성들도 여전히 일과 결혼은 둘 다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야 하는 일인 건 지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결혼’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고민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프랑스 여성 작곡가 세실 샤미나드는 “여성은 결혼과 예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말했다. 대략 150년 전의 여성 작곡가의 말에 우리가 여전히 공감한다면 아직도 우리 모두는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어린 여학생들에게 결혼과 커리어에 대해 나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다.
결혼이라는 단어만 생각해도 내 머릿속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금세 가득 찬다. 답은 모르겠고 질문만 가득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결혼 생활과 창작의 길 두 가지 모두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여성 작곡가 타유페르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남성의 그림자 안에서.
제르맨 타유페르는 프랑스 신고전주의 시류를 이끈 파리 6인조 멤버 중 유일한 여성 작곡가로서 1892년 파리 남동부 발드마른 주에서 태어났다. 제르맨의 어머니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고 제르맨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 걸맞은 음악교육을 시키고 싶어 했다. 제르맨의 어머니는 어린 딸을 스스로 가르치기도 하고 당시 음악교육기관으로는 유명했던 파리 음악원에 제르맨을 보내서 그녀의 재능을 응원하였다.
하지만 타유페르의 아버지는 그녀가 음악공부를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녀의 학비를 지원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아버지 몰래 파리 음악원을 다닌 다는 것을 안 순간 그녀를 수녀원에 보내버렸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폭력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그녀를 괴롭혔으며 추후에 그녀가 아버지 성인 타유페스를 버리고 타유페르로 개명한 것은 이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파리 음악원에서 음악 공부를 이어나갔고 간간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학비를 충당했다.
파리 음악원 재학 시절에 만난 친구들- 뒤레(louis durey, 1888-1979), 오릭(Georges Auric, 1899-1983), 오네게르(Arthur Honegger, 1892-1955), 플랑크(Francis poulenc, 1899-1963), 미요 (Darius Mihaud, 1892-1974)-을 만난 건 그녀의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지 않나 싶다. 이들의 음악 성향은 다 달랐지만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 염증을 느끼고 과거 절대 음악이 가진 객관성을 옹호하는 등의 지향하는 바가 같은 친구들을 만나 음악이야기를 하고 함께 작품을 창조하기도 했다.
1920년대부터 타유페르는 다양한 예술분야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녀의 재능을 세상에 알리는 기회를 얻었다. 1925년대 초에는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가면서 그녀의 인생에 또 한 번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녀는 미국에서 첫 번째 남편 랠프 바턴을 만났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결혼생활은 몇 년 되지 않아 좋지 않은 신호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유명한 인사들과 다양한 만남을 통해 승승장구하던 그녀의 모습을 보며 화가였던 랠프는 상대적 박탈감에 괴로워했으며 타유페르를 학대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과 함께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꿨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편과 파리에 돌아와 아름다운 저택을 사고 그 집을 꾸미는 것에 열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편의 학대는 점점 심해졌고 임신한 타유페르를 총으로 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타유페르는 유산을 하게 되고 랠프와 이혼을 한다. 이후 그녀의 재정 상황은 극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했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아껴주시던 어머니까지 돌아가신다.
정신적인 안정을 간절히 원했어서일까 그녀는 프랑스 변호사 장 라자트와 두 번째 결혼을 감행한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생활 역시 남편의 알코올 의존성과 폭력적인 행동 등으로 순탄치 않았다. 그녀는 이 시기에 모든 창작활동을 멈췄으며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기존의 악보들도 많이 잃어버리는 비극을 맞이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런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두 번째 남편이 외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타유페르는 이혼을 선택했고 그녀의 마지막 결혼생활도 끝이 났다.
그녀는 여러 가지 비극적인 개인사에도 불구하고 80세가 넘은 나이까지에도 소소한 일거리(아이들 무용 반주)를 놓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했다. 아흔한 살에 죽음을 마지 하기 직전까지도 작곡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으며 작곡을 하지 못하는 순간 되면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천진난만함.
타유페르는 파리 6인조 일원으로 활동을 했으나 언제나 자신만의 음악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녀의 음악이 포레나 라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녀가 전자음악이나 라디오, 영화음악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는 점을 보면 분명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확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남긴 발레, 오페라, 협주곡, 현악 4 중주 등 다양한 장르의 곡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녀의 곡 중 내가 가장 애정 하는 곡은 1953년에 작곡하여 4년 후에 개정 완성판을 낸 하프 소나타이다. 이 곡은 스페인 하피스트 자바레타의 의뢰에 의해 쓰였다. 이 소나타는 총 3악장(1악장: Allegretto, 2악장: lento, 3악장: perpetuum mobile)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첫 악장부터 여기저기에서 앙증맞은 발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프 소리로 인해 기분이 상쾌해짐을 느낄 수 있다. 2악장은 스페인 하피스트에게 의뢰를 받아서인지 하바네라 춤곡의 리듬을 차용하여 느리고도 경쾌한 춤곡 리듬을 잘 살렸다. 마지막 3악장은 그녀의 음악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준 라벨의 곡 중 피아노 콘체르토에서 멜로디를 일부 차용하였는데 피아노곡과 다른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5) Germaine Tailleferre: Sonata per arpa (1957) - YouTube
그녀의 비극적인 인생 스토리와 달리 그녀의 음악은 다채롭고 밝고 아름답다. 노년의 나이까지 어린아이들 발레 반주를 쳐주며 음악 곁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그녀의 인생 제일의 사랑은 사람이 아니라 음악이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