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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음 Mar 04. 2021

 K 장녀라는 몹쓸 병.

---Fanny mendelssohn(1805-1847)

신조어를 만드는 사람들의 능력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올 때가 있다. 최근 K 장녀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떠한 현상에 대해 신속하게 특징을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이름을 짓는 타고난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k 장녀라는 말은 한국의 장녀들을 일컫는 말로 그들에게 나타나는 성격적 공통점이 있다는 것에서 착안되었다. 이 신조어를 만든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 장녀들은 대게 지나치게 양보하고 쓸데없이 책임감이 강하며 어느 상황에도 자신을 낮추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라는 압력을 받으며 자란 K 장녀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가족들에게 하듯이 자신이 희생하여 양보하고 과도한 업무를 일부러 떠맡고 칭찬받을 일을 하고도 뒤로 물러선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보다 낮은 대우를 받게 하고 사람들에게 자주 이용당하며 심지어는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상실하게 되는 악순환을 낳는다고 한다.     


물론 K 장녀뿐 아니라 K 장남들도 가족에 대한 부양의 압력을 받은 건 사실이다. 그들은 꼭 성공해서 동생들과 식솔들을 ‘책임’ 져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K장남들이 성공을 위해 동생들보다 가족 안에서 최고의 교육과 편의를 제공받는데 비해 K 장녀들은 아무 대우를 받지 못하고 책임과 희생만 이 요구된다는 것이 K 장남과 K 장녀의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K 장녀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이것이 비단 한국의 만의 문제 일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과거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분위기였고 이에 따라 자신의 능력에 따른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되어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예로 동생만큼이나 뛰어난 작곡 실력과 피아노 실력을 가졌으나 아버지로부터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고, 그런 교육으로 인해 성공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낮추며 그 기회를 수없이 놓쳤던 패니 맨델스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여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     


파니 맨델스존 또는 파니 헨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팰릭스 맨델스존의 누나이다. 음악가의 인생을 공부하다 보면 음악가로 살려면 궁핍하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음악가들이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계에도 타고난 금수저가 있었으니 바로 팰릭스 맨델스존이다. 부유한 집 자제로 태어나 평생 부유하게 살았고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수많은 음악가와 달리 맨델스존은 그가 생존할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멘델스존이 한 명 더 있다. 맨델스존 가문의 또 한 명의 신동... 파니 맨델스존이다.     


1805년 레아와 아브라함 멘델스존 부부는 첫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파니이다. 레아는 파니의 손가락을 보자마자 피아노를 잘 치게 될 것이라는 직감을 가졌다고 한다. 레아는 스스로 자신의 딸 파니의 레슨을 맡았고 4살 때부터 피아노 수업을 시작했다. 레아와 아브라함은 자식 교육에 꽤 열정적인 부모였으므로 어린 딸에게 음악뿐 아니라 문학, 과학, 역사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파니가 태어나고 4년 후, 멘델스존 집안에 팰릭스가 태어나고 팰릭스 역시 음악적 재능을 보이자 이들 부부는 훌륭한 음악교사를 찾아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베를린에서 파리까지 선생님을 찾아 아이들을 데리고 갈 정도이니 이들의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느 순간부터 팰릭스와 파니의 교육방침을 다르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엄격한 유대교 가정에서 자랐던 아브라함은 여성이면 가정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이때부터 파니와 팰릭스의 가정교사는 달라졌으며 배우는 과목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팰릭스는 음악가라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지만 너에게 음악은 장식품 같은 것일 뿐이란다...(중략) 앞으로 분별 있게 처신하렴. 그것이 여성다운 일이고 명예로운 일이란다.”     


아브라함이 파니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그의 신념이 얼마나 확고한 지 알 수 있다. 파니는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펠릭스와는 다른 교육을 받았으며 팰릭스가 자신의 재능을 뽐내려 지식인과 유명인을 찾아다닐 때 그녀는 집에서 조용히 ‘여성다운’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파니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의 재능을 널리 알리는데 비해 파니의 재능을 알리는 데에는 소극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맨델스존 저택에서 열리는 음악 콘서트에 파니와 팰릭스가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되면 팰릭스 못지않은 박수를 받은 것도 파니이다.     


파니는 피아노 실력뿐 아니라 작곡 실력도 팰릭스 못지않게 뛰어났지만 그녀의 작품을 출간하는 것은 양가집 규수로서 득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작품을 팰릭스 작품집에 슬그머니 끼워 넣는 식으로 출판해주는 방법을 썼다.      


과거의 여성들은 자신의 작품을 출간하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그 이유는 어떤 창작품이던 그것을 창작한 것이 여성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수많은 악평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다른 여성 예술가들의 경우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파니와 동시대의 여성작가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처음엔 익명으로 써서 출간하였다가 나중에는 본인의 이름으로 다시 출간했는데 당시에 엄청난 공격의 대상의 되었다. 이런 분위기이다 보니 과거의 재능 있는 음악가, 작가, 조각 가등 여성 예술가들은 자신의 이름 대신 남편의 이름을 쓰거나 가족의 이름을 빌렸고 때로는 익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파니는 칸타타서부터 여러 종류의 기악곡까지 수백여 곡을 작곡하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였지만 자신의 작품을 출간할 용기를 내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파니가 병을 얻어 사망하기 직전에 겨우 용기를 내어 자신 스스로 음악가로 인정하고 출간을 준비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눈부시게 섬세한 재능.     


여성 작곡가에 대한 자료 조사를 하면 제일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여성 작곡가 중 한 명이 바로 파니 맨델스존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작품은 정말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곡에 대해 일부 평론가들은 팰릭스 멘델스존과 작곡 기법이 비슷하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유명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 작곡가들은 그녀들의 작품보다는 그녀들의 남편 또는 남동생의 이름에 별책부록처럼 덧붙여 거론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녀들의 작품에 대해 온전히 집중한 연구가 많지 않다.      


파니 맨델스존도 평생을 남동생 팰릭스 멘델스존의 그늘에 가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가치평가를 스스로도 저평가 해왔던 작곡가이다. 그런 만큼 이제라도 그녀의 훌륭한 작품에 대해 좀 더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수많은 작품 중 내가 '충격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일 년(Das Jahr)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피아노를 위한 성격 소품이다. 성격 소품이란 분위기나 장면 상황들에 맞게 음악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파니의 일 년은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기 위에 다양한 도구를 사용했다는 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19세기에 피아노라는 악기는 비약적인 기술 발전으로 인해 완성형 악기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많은 작곡가들이 피아노를 위한 작품을 많이 썼고 파니 맨델스존도 그중 하나였다.




(5) Fanny Mendelssohn: Das Jahr (1841) - Jelena Dimitrijevic, Fortepiano - YouTube



파니의 오선 옆에 화가였던 남편 빌헬름의 그림이 그려지고 멜로디에 어울리는 시를 붙인다. 이 작품은 글과 그림과 음악이 어우러진 하나의 종합예술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월부터 12월까지 모두 다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나는 특히 5월을 좋아한다.

      

“이제 가장 멀고 깊은 계곡에까지 벚꽃이 핀다.”라는 표제가 붙은 이 곡은 시작부터 다양하고 다채로운 표현이 인상적이다. 마치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듯한 느낌의 조성 변화와 불연속적인 멜로디는 마치 멜로디로 새싹이 피는 대지를 표현하는 듯하다.     


피아노라는 악기를 잘 알지 못하여 단정할 수 없지만 악보만 봐도 연주자의 테크닉과 표현능력이 많이 요구되는 곡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곡을 작곡한 파니 맨델스존이니 그녀의 피아노 실력도 분명 뛰어났으리라.     

화가이자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남편 빌헬름 헨젤은 파니에게 그녀의 작품을 출간하라고 몇 번이나 권했다고 한다. 또한 당대에 유명한 작곡가들이 그녀의 연주를 듣고 많은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주변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쉽게 내지 못했고 42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K장녀에 관한 기사를 여러 개 접하면서 파니 맨델스존 보다 더 괴로운 상황에 처해있는 수많은 K장녀의 사연을 읽게 되었다. 자신이 희생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사로잡혀 이 길이 잘못된 길임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들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파니의 경우를 봐도 옆에서 아무리 도와주려 해도 스스로 틀을 깨지 못하면 그 틀 안에서 영원히 갇혀 있을 수밖에 없음을 그녀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수많은 K장녀들이 틀을 깨고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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