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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음 Mar 09. 2021

불편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하여.

-----Francesca Caccini, 1587-After 1641.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라고 누군가 내가 묻는다면 내가 답할 수 있는 수준은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상징적 움직임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얕은 수준의 지식으로 페미니즘 운동을 생각했을 때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 수준은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디지만 천천히 좋아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자료조사를 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는데 그것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중세시대 연구가 엘리안 비에노와 페진 페르누의 주장에 따르면 중세시대에는 18세기 말보다 여성에게 더 많은 권리들이 주어졌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여성의 직업이 다양해지고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기자 부르주아 계급의 남성들은 자신이 누리던 권력을 잃을까 봐 불안감을 느꼈고 로마시대의 법을 되살려 여성들은 열등하다는 개념을 법률에 심고 여성을 향한 공격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주장을 근거로 과거의 여성 차별은 어쩌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뤄진 것이고 여성 권익은 시대 인식의 변화에서 얻어진 게 아니라 여성들이 자신의 권익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는 결론이 난다.      


작년 추석에 장애인들이 전철을 점거하여 4호선 열차가 한참 지연이 된 적이 있었다. 그 기사의 댓글에 수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호소하며 불만을 터트렸다. 하필 그 시간에 하필 그 장소에서 그때 왜 하냐? 는 내용의 취지가 대부분이었다. 많은 댓글을 읽던 중 흥미로운 의견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의 질문은 이런 요지를 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고 할 수 있는 시위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시위의 목적은 자신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목적에서 시작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선택해야 하거나 관심을 끌만 한 행위를 해야 한다. 시위의 목적 자체가 어쩌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시위를 하러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는 의식을 가지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시끄럽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나는 이곳에서 시끄럽기로 유명한 여성 작곡가 한 명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녀는 ‘지옥에서 온 여자 음악가들이 지껄인다.’는 작품의 뮤즈이기도 했다.


 얼마나 시끄러우면 저런 제목의 작품에 뮤즈가 되었을까? 메디치 가에서 일하는 음악가 중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는 그녀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그럼에도 그녀는 어떻게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되었을까?  이런 질문들과 함께 그녀의 일생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근대까지도 동료 남성 음악가보다 훨씬 적은 급료를 받았던 여성 음악가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남성들보다 좋은 급료를 받았던 여성 작곡가가 있었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이 대단한 여성 작곡가의 이름은 프란체스카 카치니다.


    

끊임없이 떠들었던 여성 작곡가.          


메디치가는 이탈리아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15~17세기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가장 큰 후원자라고 할 수 있다. 메디치가는 당시 피렌체 지방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는데 프란체스카 카치니가 태어난 1587년도 역시 메디치가의 막강한 영향력 안에 있을 때였다.     


프란체스카의 경우 양친이 모두 음악가였으며 그녀의 아버지 줄리오 카치니는 메디치 궁정 안에서도 매우 영향력이 있는 음악가로 메디치 가에 예술가들을 영입하는데 관여했으며 지식인들과 귀족들의 모임인 피렌체 카메라타의 멤버이기도 했다.     


프란체스카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형제들과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총명했으며 당시 시대에 다른 소녀들처럼 정규적 교육을 받을 수 없었지만 아버지 줄리오의 배려로 자녀들 중 유일하게 인문학과 여러 가지 언어를 익힐 수 있었다. 줄리오는 프란체스카의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마자 역시 음악가인 여성과 재혼을 했고 이들은 가족 연주단체를 만들어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프란체스카는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와 유럽의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지배계층의 각종 행사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앙리 4세가 프란체스카의 재능에 감명하여 그녀에게 높은 봉급을 주기도 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재능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프란체스카는 메디치가의 화려한 행사들에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고 드디어 메디치가에서 그녀에게 일자리를 주겠다는 연락이 온다.     


메디치 궁정 안에서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녀는 가난한 음악가 조반니 시뇨리니와 결혼하게 된다. 당시의 메디치 가는 기혼 음악가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필요에 의한 결혼이었다.  

   

프란체스카는 메디치 궁전 음악가로 20년간 일했으며 음악을 작곡하는 일 외에 여성들이나 귀족 자제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즉흥연주를 하는 등의 음악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일을 했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열심히 일한 그녀는 1614년에 이르러서는 메디치가 음악가로서 최고의 급료를 받는 음악가 된다.     


 프란체스카는 본인의 뛰어난 업적에 비해 주변인들에겐 인격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메디치 궁전의 시인이자 대본가인 살바토리에게 자신을 위한 오페라 대본을 써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단번에 거절하고 [지옥에서 온 여자 음악가들이 지껄인다.]라는 시를 발표했다.


프란체스카는 평소에 모든 부분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훌륭한 성악가이자 연주자이기도 했던 그녀는 제자들에게 매우 엄격했으며 연주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불같이 화냈다고 전해진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하여 완벽한 연주 테크닉을 겸비하는 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녀의 불같은 잔소리는 제자들이나 동료들에게 마냥 이해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프란체스카는 살바토리에게 복수할 날만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기회를 잡은 프란체스카는 살바토리가 메디치가 결혼식에서 쓸 오페라 대본을 쓴 것을 보고 메디치 대공비에게 살바토리에게 불리한 해석을 내놓는다. 그녀의 해석을 들은 메디치가의 대공비는 살바토리에게 대본을 다시 쓰게 했고 그는 기껏 쓴 대본을 폐기해야 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수동적인 여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랄까?   


그녀는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가 커가는 과정에서도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남아있는 문헌에 따르면 오페라를 작곡한 최초로 여성이라고 한다. 그녀가 최고의 보수를 받았던 데에는 그녀의 이런 끈질김도 한 몫 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자.          


그녀의 작곡 능력은 그녀와 밀접한 성악곡들에서 빛을 내었고 특히 <알치나의 섬에서 루지에로의 해방>이라는 작품은 당대 유명 작곡가 몬테베르디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그녀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고 한다.    


Francesca Caccini's "La liberazione di Ruggiero dall'isola d'Alcina - YouTube


이 작품은 1625년에 메디치가 대공비의 딸 마르게리타와 폴란드 왕세자 브와디스와프의 혼인을 위한 행사에서 공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전사 루지에로를 두고 두 명의 대조적인 마법사인 알시나와 멜리사가 싸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알시나는 관능적인 것을 추구하는 반면 멜리사는 도덕적이다. 쉽게 생각하면 나쁜 마녀와 착한 마녀의 싸움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멜리사의 목적은 루게리오를 알치나의 성적 주문으로부터 구해내어 군 복무를 마치고 약혼자 브라다만테에게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멜리사는 늙어가는 아프리카인으로 가장한 루지에로를 찾아 전투에 복귀하도록 설득한다.      


알치나는 돌아와 루지에로가 떠났다는 것을 깨닫고 루지에로를 찾아 그를 힘으로 이겨 다시 되찾으려고 하지만 결국 그를 되찾지는 못한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그를 찾기 위해 용을 타고 자신의 섬에서 떠난다.     

멜리사는 알치나의 마법에 걸려 식물이 된 여성과 남성들을 구하고 모두 축하하며 즐거워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이 작품은 아버지에게 지참금을 주고 딸을 달라고 하는 가부장적 결혼문화가 팽배하던 시대에 여성의 영웅담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현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대본은 페리디난도 사라치넬리라는 사람이 쓴 것이지만 프란체스카가 그 대본 선택하고 그것을 메디치가 행사에서 쓰겠다고 결정한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를 두고 프란체스카가 남성이 지배하던 군주제,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다. 더욱 재밌는 것은 대공비 딸 마르게리타의 결혼은 이 행사 후에 취소가 되었다.


 그녀의 인생을 되짚어 보면 9명의 형제들과 함께 자라면서 유일하게 인문학과 언어를 습득하고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자에게 침묵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일과 관련된 일이라면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 싸움닭처럼 달려들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모두 받쳐 시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과거 시위가 잦지 않았던 시대를 보면 그들의 인생은 주종관계가 확실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환경에서 살았다. 그럼에도 목숨을 바쳐가며 인간의 평등을 주장해 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현재에 우리가 누리는 것들이 있는 것이고 그들이 사람들의 불편의 야기하며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했기에 우리가 누리는 권리들을 얻을 수 있었다.      


시위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명심하자.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부분의 자유는 그렇게 시끄러운 전투 후에 얻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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