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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음 Mar 12. 2021

거친 사람들의 이유.

-------Ethel Smyth,1858-1944

나는 여성 작곡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고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성 작곡가에 대해 조사를 하면 할수록 그녀들의 인생여정 곧곧이 페미니즘으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페미니즘 운동에 관한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초기 페미니즘 운동의 모습은 매우 거칠고 거셌다. 그도 그럴것이 초기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 했던 여성들은 가족이나 배우자에게 성적, 정서적인 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하던 여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모든 남성에게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며 남성은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20세기 초에 일어난 영국에서 일어난 페미니즘 운동은 과격하다는 인상까지 준다. 초기 영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달리는 경주마에 자신의 몸을 던져 항의의 뜻을 전달한다던가 (에밀리 데이비슨 1913년 6월 4일 사망) 건물에 불을 지르거나 창문을 부수는 등의 물리적 싸움을 지향하는 단체들이 많았다.      


여기에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과격한 시위를 벌이는 페미니스트들과 같은 시대를 산 여성 예술가들도 분명 성차별에 대한 강한 불만이 있는 여성 그룹이었는데 그들은 이 시기에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여성 음악가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놓인 상황에 순응하면서도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자신의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소극적인 저항을 해오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읽었던 여성 음악가에 관한 책을 살피며 두 가지 추론을 하였다. 첫 번째로는 같은 시기의 페미니스트와 여성 예술가들은 교류가 별로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두 번째로는 여성 음악가들은 페미니즘 운동에 직접적인 참여를 안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들이 방망이를 들고 창문을 부수거나 화염병을 던지며 불을 지르는 일들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있어서였기 때문이다.   

  

음악계의 페미니즘 운동은 작품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려는 찰라, 나는 매우 흥미로운 여성 작곡가를 알게 되었다. 긴 치마 위에 넥타이 정장을 입고 행진을 하며 유리창을 깨부수셔서 감옥에 수감됐으며 감옥 안에서도 칫솔로 지휘를 하며 페미니즘 운동가들을 격려했던 에셀 스미스가 그 주인공이다.   


       

항의하는 아이.          



에셀 스미스의 유년 시절은 이미 범상치가 않았다. 1858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녀는 팔남매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나이때부터 외국어와 예술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10대때 이미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을 한다. 그녀의 꿈을 응원해주는 어머니와 달리 군인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여성이 음악을 작곡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직업 군인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으나 그녀는 아버지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원하는 길로 가기 위해 가족 내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졌다. 알고보면 그녀는 이때부터 시위대 앞에 설 재목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본인의 뜻대로 음악을 공부하게 되었고 펠릭스 멘델스존이 설립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이 시기에 클라라 슈만, 브람스, 드보르작, 그리그 등 당대 유명한 작곡가들을 만나며 작곡에 대한 열망을 더 키워나갔다.  

   

에셀은 1880년 중반이 넘어서면서 작곡가로서의 역량을 뽐내기 시작했다. 피아노곡, 실내악 작품, 미사곡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향상 시켜가던 그녀는 ‘여성답지 않은 실력’ 이라는 칭찬<?>을 듣게 된다. 당시엔 여성들이 자신의 작품을 출간되거나 발표만 해도 무수한 악평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꺼려했고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런 시기의 ‘작품을 남성 작곡가 같이 썼다.’는 그들로서는 호의였던 것이다.  

   

당시 평론가들은 ‘여성 답지 않게 작곡을 잘했다.’ ‘여성 작곡가지만 남성 작곡가처럼 썼다.’ 등의 평을 쓰며 그녀의 곡을 인정했다. 물론 한편에서는 여전히 혹평도 쏟아져 나왔지만 말이다. 나는 그녀가 이런 모든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련의 과정들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여성운동 참여로 이끈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여성의 참정권을 위하여.          



에셀은 1910년에 WPSU (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의 리더인 에멀린 팽크허스트를 만난다. 에멀린은 당시에 영국 여성들의 참정권을 위해 싸우던 급진적 여성운동의 대명사였다. 그녀는 무력시위나 단식투쟁 등 비합법적인 무력저항을 통해 남성들이 만든 법에 저항했다. 에셀은 에멀린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음악 활동까지 접은 채 그녀의 시위를 돕기 시작한다.  

   

그녀는 1912년에 여성 참정권을 위한 시위를 하다가 창문을 부수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교도소 안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여성들이 많이 잡여왔고 그중 극작가이자 배우인 세실리 해밀튼과 함께 <여성 행진곡>이라는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실 리가 가사를 쓰고 에셀이 작곡을 한 여성 행진곡은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의 상징적인 곡이 된다. 그녀는 2개월의 짧은 교도소 생활을 했지만 그후로도 에세이와 기사를 쓰며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투표권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펼쳐나갔다.     


이 운동을 통해 영국은 1918년에 부분적으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워졌고 1928년에는 성인 여성 모두에게 투표권이 주워졌다.     


남성다운 것이 아니라 그녀다운 것.         

 

그녀의 작품은 두 가지 이유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첫 번째로는 여성 작곡가가 남성처럼 작곡을 잘한다는 이유이고 두 번째는 여성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여성 작곡가가 남성처럼 작곡을 한다.’ 라는 칭찬인 지 욕인 지 모를 이 말은 그녀를 괴롭히는 평가 중 하나 였다. 일부 평론가들은 에셀이 리드믹하고 강렬한 곡을 작곡하면 여성인데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악평을 하고 그녀가 섬세하고 서정적인 멜로디 라인을 만들면 역시 여성 작곡가라 남성 작곡가들처럼 작품으로 표현하지 않고 감정에 호소한다는 평을 썼다. 결국 이러나 저러나 좋지 못한 평을 들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많은 혹평이 쏟아졌던 이유는 그녀가 여성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을 탐탁치 않아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에델이 음악활동을 쉬고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두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무리들은 음악과 관련 없는 사회운동을 하기 때문에 작품의 방향성을 잃었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Smyth - Cello Sonata Op.5 (II) - YouTube


나는 솔직히 그녀의 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취향과 그녀의 곡은 접점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 지 느낄 수 있었고 그녀의 열정에 압도되었다. 그녀의 작품 중 첼로 소나타는 꽤 여러 번 듣게 되었는데 전주도 없이 조용히 치고 들어왔다가 첼로와 피아노가 싸우듯 금세 몰아치는 1악장을 시작으로 어둡고 슬프게 덤덤히 스며드는 2악장까지 오면 가을엔 나도 모르게 생각나는 곡이 되겠구나 싶었다.     


이 곡은 1887년부터 독일의 첼리스트 줄리어스 클랭겔을 위해 쓰여지기 시작했는데 에셀의 곡은 독일에서 꽤 인정을 받았다. 연주자의 기교보다는 곡 자체의 심상을 중요시했던 브람스의 영향을 받아 심오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 이런 점이 독일 청중에게 사랑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에셀은 생존 당시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더럼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1922년에는 2등급 훈장을 받아 데임(Dame)이라는 직함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 동안 자전적인 글을 쓰면서 세상에 만연하는 성차별에 대해 분노하였으며 자신도 그 희생자라고 서술하였다.     

 

에셀의 곡은 여전히 그녀에게 영향을 준 다른 작곡가들의 이름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어느 음악가가 그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색깔로 창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나는 세상의 모든 창작자는 사람이던 물건이던 환경이던 그것이 그 무엇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받고 그것들에 자신만의 색깔을 첨가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에셀의 곡들도 남성적이거나 브람스다운 곡이아니라 그냥 그녀다운 곡이라고 평가받아야 할 때이다.     


그녀의 곡은 다채롭고 강렬하며 슬프고도 아름답다. 이것은 그녀가 살아온 거칠면서도 강렬하고 고된 여정이 담긴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시위든 폭력적인 방법을 취하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 든다. 무언가를 때려 부수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길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피력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초기 급진적인 페미니즘 운동은 해외던 한국 내에서이던 거칠고 폭력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절박했고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은 강한 항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의 항의는 그들이 당해왔던 폭력과 똑같이 거친 방법으로 행해졌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관찰자들은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좋지 못한 인상을 받았다.     


 초기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던 한 명의 관찰자로서의 나는 에셀 스미스의 인생을 돌이켜보며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몽둥이과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지 않았더라면 내가 과연 지금 남성들과 동등한 입장으로 투표권를 행사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모든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운동도 사회의 발전과정에 따라 변화해가는 것이고 지금도 변화하는 중이다. 어떤 사회운동이든 그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지켜보는 시선도 공정해야 한다는 반성을 해본다.     


평생 10권의 자전적인 책을 쓰며 성차별에 대한 항의에 거침이 없었던 에셀 스미스는 노년시절의 일기에 “무엇이 되기엔 너무 늦었다.”라는 표현을 남겼다고 한다.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창문을 부수던 그녀도 노년엔 세상과 싸우는 일에 지쳤었나보다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가련해진다. 그녀가 혹시 들을 수 있다면 급진적인 사회운동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생각을 당신의 음악이 바꿨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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