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이음 Mar 23. 2021

이상하지 않은 것이 이상해질 때.

---------unsuk chin, 1961-


최근 서점에 들렀다가 의외의 것을 발견하고 재밌는 경험을 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아이들을 위한 위인전의 목차였는데 신사임당을 소개하는 문구가 나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내 발길을 잡은 요즘 위인전에서의 신사임당은 ‘우리나라 제일의 여성화가’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위인전의 신사임당 소개문구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 였는데 말이다.     


우리 집 책장에는 백과사전과 위인전이 가장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위인전에 있었던 여성 위인을 기억하고 있다. 유관순, 신사임당, 마리 퀴리, 나이팅게일, 헬렌 켈러 이렇게 총 5명이었다. 위인전이 총 몇 권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책장의 두 칸을 가득 채웠던 것으로 보아 최소 50권은 되었을 것이다. 50여 권이나 되는 전집 안에 여성 위인들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 수가 너무 적어서이기도 하지만 유년 시절에 책장에 있는 전집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꽤 많이 한 기억이 있어서이다.     


나는 유독 여성 위인의 일대기를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의 일대기는 정약용, 장영실, 세종대왕보다 하찮아 보였고 라이트 형제, 에디슨, 아인슈타인의 일대기보다 재미없었으며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픈 이야기가 가득했다. 어린 마음에도 뭔가 이상했다.      


최근, 나는 여성 작곡가들의 삶에 대해 알아보면서 성별 간 불평등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전에는 내가 불평등한 조건에서 놓여있다는 생각을 별로 안 했고 깊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서적을 읽으면서도 나는 과거의 여성의 삶에 비해 현재의 여성의 삶은 분명 여러 가지 면(교육의 기회, 고용기회, 투표권 등)에서 자유로워진 부분이 많고 불평등했던 부분들도 많이 개선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페미니즘과 관련된 서적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현재 상황이 정말로 평등하냐는 고민을 하게 하는 질문들을 계속 접하게 된다.     


사회경제가 어려워지면 남성의 빈곤층보다 여성 빈곤층 비율이 왜 더 늘어나는가? 우수한 여성 인력이 꾸준히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왜 여전히 20% 미만인가? 대중 매체에서는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데 가정폭력에 희생되는 여성의 수는 왜 줄어들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자신이 불평등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생각지도 못한 나에게도 자극이 되었고 현재의 사회 모습을 좀 더 비판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지금보다 훨씬 더 민감한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봤던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위인전의 일화도 그렇지만 나는 자라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꾸준히 했다.      


나의 귀가 시간은 왜 온 가족 관심의 대상이어야 하는지, 여성으로 해야 할 처신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오랜만에 만난 친척은 왜 그렇게 내 외모의 변화에 신경을 쓰는 건지.     


어렸을 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이상했던 아이였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모든 것이 이상하지 않은 어른이 되어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곡가 진은숙은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한국의 여성 작곡가이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들은 것은 그녀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작곡가로 임명되고 세간의 주목을 받은 2006년이었다. 작곡을 전공한 동성의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그 누구도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혜성처럼 나타난 그녀의 존재는 나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진은숙은 1961년 목회를 하는 가정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음악 평론을 하는 언니 진회숙과 미학을 전공하고 교수 생활을 한 진중권 씨까지 4남매 중 3명이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녀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정형편이 좋지 못해서 어렸을 때는 작곡을 전공할 생각을 못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는 예고에 다니는 언니의 숙제를 대신해주면서 작곡가의 꿈을 키웠고 3수 끝에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하게 된다. 서울대학교에서 만난 스승 강석희 교수는 그녀의 작품에 대해 과할 정도로 큰 칭찬을 해주었고 덕분에 진은숙은 대학 생활을 하면서 작곡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다.     


그녀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독일 함스부르크에서 만난 스승 죄르지 리게티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칭찬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던 강석희 교수와 달리 엄격하기로 유명한 리게티 교수를 만나 꽤 오랜 시간 슬럼프를 겪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혹할 만큼 혹독한 리게티의 가르침을 버텨낸 진은숙은 현대음악 작곡가로서 받을 수 있는 우수한 상을 휩쓸며 세계적인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독일에서 주로 생활하고 1년에 한두 번만 내한하는 방법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진은숙은 2006년 당시 서울시향 지휘자였던 정명훈 지휘자의 요청을 받고 서울시향 상임 작곡가라는 직책을 맡아 활동하게 된다.   

   

그녀는 현대 음악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낯설었던 당시 한국 클래식 음악의 관중들에게 ‘아르스 노바’라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는데 이는 현대 음악을 일반 관중에게 소개하는 프로그램으로 곡 선정부터 소개까지 기획하며 현대 음악을 한국 클래식 음악 관중에게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진은숙이라는 작곡가의 존재는 나에게 이상한 앨리스 같은 존재였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지만, 여성 작곡가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여성 작곡가는 작곡을 공부해도 실제로 활동하지는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보는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세계를 나에게 선사하였다. 진은숙 작곡가는 클래식 음악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그라베 마이어 상을 비롯해 작곡가 이름을 딴 상들 쇤베르크 상, 바흐 상, 시벨리우스 상을 받았으며 그 외에도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상을 받았다. 현재는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들이 그녀의 곡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이다.          

 

이상함을 들여다보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장르 자체에 거부감 혹은 어려움을 느끼는 대중들이 많기에 클래식 음악인 데다가 현대 음악이라고 하면 한국 관객들은 난감한 기색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은 직관적인 음악이 아니어서 단순하고 직관적인 음악에 길들어 있는 사람들은 5분이 넘어가는 긴 곡을 듣기조차 어려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현대 음악은 음악을 듣는 정도를 넘어서서 깊이 연구하고 느껴야만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어서 클래식 음악 전공자들조차도 힘겨워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의 예술 방향이 그러하듯 모든 작가의 창작행위는 너무나 다양한 방법으로 양산되기 때문에 그것을 쫓아가야 하는 관객으로서는 당연히 ‘어렵고 이상하다.’라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진은숙의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그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이고 클래식계에서 저명한 상들을 휩쓸었다고 해도 그녀의 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그녀의 음악이 이상할 것이다.      

현대 음악에 거부감이 없는 나조차도 진은숙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는 난감하고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없이 다양한 소리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지는데 어디에 방향을 두고 쫓아가야 할지 당황스러운 느낌이었다.


https://youtu.be/pSPsgz6ILMY


      

내가 적응된<?> 그녀의 첫 음악은 그라피티라는 곡이다. 그녀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내 느낌은 진은숙의 음악은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것이다. ‘이게 뭐야?’ 라며 여러 번 반복해서 듣다 보면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고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진은숙의 음악에 대해 많은 평론가가 다양한 이야기를 하지만 내가 가장 공감한 이야기 중의 하나는 그녀의 음악은 텍스트가 있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칸딘스키가 들리는 음악을 보이는 그림으로 표현했듯이 그녀의 음악을 가만히 집중해서 듣다 보면 눈앞에 하나의 스토리가 펼쳐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소리라는 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이야기를 조화시켜나간다고나 할까? 그렇게 이상한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여성 작곡가들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평소에 이상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상해지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 아직 초등학생밖에 안된 아이들에게서 성차별적인 언어들을 발견하게 된다던가,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행동을 한 번 더 되돌아보고는 깜짝 놀란다든가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깊게 스며들어있는 인식하지 못한 성차별적인 행동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상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상해지기 시작하면 예전보다 확실히 더 생각이 많아지고 귀찮아진다. 돌이켜보면 나는 정말 오래전부터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에 반감을 느끼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귀찮고 피곤하고 신경 쓰기 싫다는 이유로 오랜 시간 이런 문제를 회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번에 글을 쓰면서 나의 내면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여성운동에 관한 책들을 조금 읽어보는 것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온전히 통찰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이상하지 않은 세계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이상한 것을 이상한 채로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이상한 것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상하고 불편한 마음을 누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 일을 선행해본 선배로서 말이다.          

이전 09화 여자와 남자는 적일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