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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음 Mar 20. 2021

여자와 남자는 적일까?

--------Louise Farrenc, 1804-1875

한창 미투 열풍이 불었을 때 내가 체감한 남성들의 반응은 ‘또 시작이네.’ 또는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라는 반응이었다. 1990년대 이후로 한국에서도 여성 인권 운동이 의미 있는 화두가 되었고 많은 남성이 여성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남성들은 여성운동을 여전히 ‘여성’만의 것으로 취급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는 운동에 점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과거와 비교해볼 때 많은 부분 (투표권, 임금 문제, 가정 내 양육 문제 등)이 개선되고 있지만 이런 사회적 변화에 저항하는 남성들이 아직 많이 존재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여성운동에 불쾌감을 나타내는 남성들의 모습을 보면 여성운동은 성 문제가 아니라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종, 계급, 정치 등에서 특권을 누려왔던 일부 계층들은 피지배층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평등을 요구할 때마다 자신이 누리던 특권을 지키기 위해 강하게 저항해왔다. 이런 모습은 여성운동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남성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내가 과거에 페미니즘이 두렵다고 생각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젠더 이슈는 제한된 사회 안에서의 소수의 특권계층과 다수의 피지배계층의 싸움이 아니라 인구의 절반과 또 다른 절반이 싸우는 대규모의 싸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거 여성 음악가들의 삶은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많은 압박과 멸시를 받으며 ‘정신력’으로 버티는 창작활동이나 연주 활동을 했다. 누나의 작품을 출판하는 것을 반대한 팰릭스 멘델스존이나 클라라 슈만이 결혼 기간의 대부분을 임신 상태로 있게 한 로베르토 슈만을 보더라도 남성이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흡사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행하는 행동과 유사한데 지배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생기면 그 존재를 예외적인 경우로 깎아내리거나 위험한 존재로 각인시켜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한다.     


나는 여성 음악가들의 삶에 대해 알아볼수록 그녀들의 삶에 깊게 침투된 불평등 문제에 대해 분노하게 됐다. 그녀들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라는 명목 하에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친구들에 의해 음악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그들은 여성 음악가로서 특출 난 재능을 보이면 그 재능을 우습게 여기거나 무시하는 시선과 싸워야 했고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과 아버지에게 가정에 충실히 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남성중심주의가 만연하는 사회에서는 여성과 남성은 어쩔 수 없이 적이 될 수밖에 없느냐는 회의감이 들 때쯤 그녀들의 역사 속에서 그녀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남성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회적 분위기에 상관없이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신의 부인, 여동생, 친구를 도왔으며 그녀들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내보이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 때조차 그들을 격려했다.          


남성이 사회 중심인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활동을 돕는다는 것은 남성으로서도 일종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남성이 여성의 사회활동을 돕는 일은 비주류적인 행위였기 때문에 19세기 이전의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드러내 놓고 하는 남성들의 수가 현재보다 현저히 적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지인들을 알아보고 그들의 사회활동을 돕는 남성들의 행위는 여성들이 여성운동을 해서 얻어낸 여러 가지 권리들과 마찬가지로 여성 권리 신장에 유의미한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서 루이즈 파랭과 그의 남편인 아리스티드 파랭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사회적 분위기와 상관없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남성과 그의 도움을 받으며 주류 사회로 편입한 여성 음악가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루이즈 파랭은 19세기에 활동한 여성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여성 음악가와 비교해 남성들(아버지와 남편)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녀의 성취 뒤에는 그녀의 남편 아리스티드의 많은 도움이 있었는데 여성의 역할과 남성의 역할이 뚜렷하게 구분되던 시대에 루이스 파랭을 향한 그의 지원은 내게 큰 인상을 남겨주었다.          


미술가 집안에서 자란 음악가.          


루이즈 파랭은 1804년 자유로움을 중시하는 미술가 자크 뒤몽과 마리 엘리자베스의 딸로 태어났다. 루이즈에게는 오빠 오퀴나즈가 있었는데 그도 유명한 조각가가 된 것을 보면 루이즈 파랭이 미술가의 길로 가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루이즈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미술보다는 음악에 관심을 보였으며 그녀의 부모도 그것을 알고 루이즈가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훌륭한 가정교사를 초빙하였다.     


그녀가 피아니스트로서 성장하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한 세실 소리아는 피아노 음악에 거장인 클라멘티의 제자로 루이즈 파랭이 전문 연주자의 길을 갈 수 있는 초석을 닦아준 사람이다. 그녀는 루이즈 파랭의 부모와도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며 루이즈 파랭이 파리음악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루이즈 파랭이 작곡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파리음악원에서 만난 작곡가이자 훌륭한 플루티스트인 안토닌 레이하를 만난 후부터이다. 이들의 만남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피아노 연주자의 길만을 생각했던 루이즈 파랭이 작곡을 배울 기회를 얻은 것이었고 두 번째는 안토닌 레이하에게 사사하던 루이즈 파랭이 레이하와 인연이 있던 남편 아리스티드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음악가와 음악가로서.     


아리스티드는 루이즈 파랭의 연주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루이즈 패랭과 아리스티드는 첫 만남이 있었던 1821년에 곧바로 결혼식을 올렸으며 루이즈는 학업을 중단하고 남편과 함께 연주 여행 겸 신혼여행을 떠났다. 이 둘은 함께 연주하며 여행을 하는 생활을 이어나갔고 아리스티드는 10살이나 어린 루이즈 파랭을 동료 연주자로 대우해주며 그녀를 존중했다.      


아리스티드와 루이즈는 긴 여행을 마치고 파리에 정착했으며 루이즈는 파리음악원에서 학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아리스티드는 파리에 정착하게 되면서 음악 전문 출판사 에디시옹 파랭을 설립하였으며 추후에 아내의 악보를 손수 출판해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작곡과 연주를 병행하고 있던 루이즈를 위해 그녀만을 위한 연습실을 만들어줌으로써 그녀가 작곡과 연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그 누구와 견주어도.          


루이즈 파랭은 51곡의 곡을 작곡했고 죽기 직전까지 피아노 연주자로 사는 삶을 살았으며 유명 작곡가들을 가르치기도 한 명교수이기도 했다. 그녀의 이런 다채로운 활동에는 남편 아리스티드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아리스티드는 그녀가 연주 활동과 작곡을 할 수 있도록 환경적인 도움을 줬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많은 영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피아노곡을 주로 작곡하였지만, 피아노곡 외에 플루트 곡과 실내악곡 작곡에 관심을 둔 것은 뛰어난 플루티스트였던 남편 아리스티드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 아리스티드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남성중심주의적 불평등의 희생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파리음악원의 최초 여성 교수로 임용되었지만, 동료 남성 교수들과 같은 급료를 받는데 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며, 그녀는 이 일을 해내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일들(관객들에게 인기 있는 곡을 작곡하는 등)을 해내야 했다.     


루이즈 파랭은 많은 곡을 작곡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음악은 고전 시대의 엄격한 형식을 따르면서도 낭만 시대의 표현력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가졌다. 특히 그녀가 작곡한 교향곡 3번은 초연 당시 베토벤 교향곡 5번과 함께 연주되었는데 많은 청중이 그녀의 교향곡에 더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이룬 작품이다.  


   

https://youtu.be/uLSww02ptiI


이 곡은 1947년에 완성되고 1949년에 초연되었는데 나는 3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에서 2악장을 가장 좋아한다. 클라리넷의 목가적인 선율로 시작하는 2악장은 목관의 연주를 현악기에서 받아 점점 고조되는 형태로 끝나는데 고전주의 형식에 기초를 두면서도 낭만주의 정신을 계승한 그녀의 독특한 작곡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루이즈 파랭은 동시대 작곡가인 로베르토 슈만과 베를리오즈에게 존경을 받은 인물로 알려진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은 아직도 대중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낯선 음악이다. 그녀의 수준 높은 교향곡을 들으며  루이즈 파랭이 51곡의 곡만 작곡한 것이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여성 음악가의 음악이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런 사람들에게 루이즈 파랭의 교향곡 3번을 꼭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재능이 묻혀지는 것은 세상의 절반의 재능을 버리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관연 인류에게 이로운 일인지....정말 안타깝다.

      

여자와 남자는 적일까?          


과거 여성운동의 시작은 많은 권리를 누리는 남성들을 향한 여성들의 분노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여성운동은 한 가지 논리로 단순화시키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사회적 문제들과 얽혀있고 성을 떠나서 남성중심주의에 젖어있는 여성과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남성들이 출연함으로써 그 양상이 더욱 복잡해졌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떤 기득권 집단이든 자신이 누리던 특권을 스스로 자연스럽게 내려놓는 경우를 본 적이 없으며 그러므로 남성들도 자신 누리던 특권을 버리는 것에 앞으로도 저항을 계속하리라 생각한다.   

   

이상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남성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남성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나누는 변화에 적응할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현재를 사는 여성들은 과거의 많은 여성의 투쟁으로 쟁취한 권리들을 다시 빼앗기는 일을 할 리가 없으며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수의 여성과 남성은 서로를 원하며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관계에선 불평등은 불행으로 가는 길임을 우리는 많은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떻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신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남성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여자와 남자가 적이 되는 것보다는 평등해지는 것이 우리가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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