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이음 Mar 15. 2021

작은 실천으로 시작하는 반성문.

-------Cécile Chminade, 1857-1944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존재에 대한 대중의 생각이 궁금하다. 최근까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만 들으면 ‘시끄럽고’, ‘무섭고’, ‘어렵다.’라는 생각을 했던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의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의 시작은 사실 꽤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가부장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던 나는 사춘기에 들어서자 막연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급격히 냉각되는 분위기 안에서 어머니는 늘 아버지가 최우선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들은 매로 가르쳐야 하고 아내에겐 권위 있는 남편이어야 하며 딸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신경을 꺼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지신 아버지는 본인의 생각대로 가정을 이끄셨고 그런 가풍 속에서 자라던 딸은 왠지 모르게 자꾸 화가 났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알게 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반항심이 극에 달해 있던 나에게 페미니즘에 대한 첫인상을 ‘어렵다.’로 정의하게 된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당시엔 학생들이 읽을 만한 페미니즘 서적이 없었고 나는 그 시절 제일 유명한 페미니즘 서적을 골랐을 뿐인데 그 책은 고등학생이 소화하기엔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엄청나게 두꺼운 두 권의 책을 꾸역꾸역 힘들게 읽었지만 다 읽었을 쯤엔 페미니즘은 내가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당신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내 기억 저편에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던 페미니즘은 몇 년 전 ‘82년 김지영’이라는 베스터셀러가 나오면서 내 관심을 다시 한번 끌었다. 그 이후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일어나면서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의 열풍이 불었을 때 여기저기에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고백이 이어지며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설전이 일어났다. 엄청나게 시끄러웠고 남자와 여자는 싸우기 시작했으며 서로에 대한 혐오의 말들이 오갔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또 한 번 페미니즘과 멀어졌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면 왠지 커다란 싸움에 휩쓸릴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여성 작곡가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여성 작곡가의 작품을 찾아보고 그녀들의 생애를 공부하는 것이 페미니즘으로 연결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서적을 찾아본 것은 아니었다. 나에겐 그때까지도 여전히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여성 작곡가의 인생 여정은 자연스럽게 페미니즘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는 여전히 어렵고, 무섭고, 두렵지만 그녀들의 인생과 페미니즘을 연결해보기로 했다. 여성 음악가의 일생은 페미니즘과 연결 짓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가부장적 풍조가 사회 전반에 만연 할 때에 여성 창작자들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이유로 욕을 먹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칭찬은 ‘여성 답지 않게 잘 만들었다.’ 정도였고 대부분의 여성 음악가들은 동시대의 남성 동료들보다 훨씬 적은 대우를 받고 일을 해야 했다.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자신을 옭아매는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세상에 직접 맞서 싸우기보다는 자신의 편이 되어줄 부유한 환경의 여성들의 도움을 받거나 내면의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세실 샤미나데는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여성 작곡가이다. 그녀는 어렵고 진지한 분위기의 음악보다는 대중들에게 친근하고 가볍게 다가갈 수 있는 음악을 선호했고 이런 그녀의 경향은 많은 여성들이 그녀의 음악을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들이 사랑한 여성 음악가.          


1857년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세실 샤미나데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부모님 덕분으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 소리가 넘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세실 샤미나데의 집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들었고 작은 음악회가 수시로 열렸다. 세실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사랑했고 제대로 된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길 원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 시대의 평범한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딸이 정규 음악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페라 카르멘을 작곡한 비제는 세실과 이웃이었는데 세실의 피아노 실력을 알고 그녀의 부모에게 정규적인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시켜볼 것을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고집에 따라 가정교사를 고용해서 음악 수업을 받는 방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았다.     


세실은 자신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면서 자신의 자작곡을 선보였고 그녀는 작곡, 피아노 연주, 지휘, 편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평생 음악가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1887년 세실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집안 사정이 매우 어려워졌고 그녀는 이전과 같이 가족의 후원을 받으며 작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금방 인지하고 잘 팔리는 곡을 작곡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때부터 연주하기 부담스러운 대규모 교향악 작품보다는 피아노 곡이나 성악곡 또는 소규모 편성의 곡들을 선호하게 된다.     


세실은 전업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의 곡을 직접 연주하고 홍보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연주 여행을 다니며 자신의 음악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녀의 곡은 영국과 미국에서 특히 인기가 좋았는데 그녀가 부지런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녀의 곡을 알리지 않았다면 얻지 못할 성과였다.      


세실의 곡이 인기가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전통 클래식 음악에 기반을 두면서도 어렵지 않은 멜로디로 많은 여성들에게 어필하였기 때문이다. 무거운 주제를 가진 곡이 인정받던 시대에 세실은 과감하게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음악도 클래식 음악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세실은 전문 음악가가 아닌 사람들도 음악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전문적으로 음악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다양한 수준의 악보를 만들었다. 덕분에 그녀 음악은 어린아이부터 주부까지 그동안 클래식 음악에서 소외되어있던 틈새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녀의 음악회는 언제나 여성들로 가득했고 많은 여성들이 그녀의 음악을 듣고 그녀의 악보를 사서 연주해보고 그녀의 공연장을 찾았다. 그녀의 이런 성공에 일부 언론들은 클래식 음악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 낮은 음악에 여성들이 환호한다면서 비아냥 거렸지만 세실은 이런 혹평에 차별적인 기회에도 불구하고 창조적인 작업을 이어나간 과거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여성 음악가들은 불리한 조건에서도 강한 정신력으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세실은 연주를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다녔지만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소수의 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조용히 지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집에서 머물며 작곡을 하고 휴식을 취하며 작곡을 했다. 프랑스 내의 음악가들과는 비제 외에는 특별한 친분을 유지한 사람도 없었으며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를 이끌어줄 스승도 없었다.    

  

그녀는 가정교사들에게 배운 지식들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갔으며 자신의 음악을 사랑해줄 사람들을 찾아 여행을 다녔다. 그녀의 음악이 여성들과 학생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그녀의 성장배경이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여성들의 삶을 잘 이해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집어 낼 줄 아는 음악가였다.          


실천하는 여성.     


세실 샤미나데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그녀가 작곡을 시작한 초창기에는 자국 내에서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여성이라는 점과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은 프랑스 평론가들에게 씹기 좋은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곡이 해외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자 프랑스 내에서도 그녀의 공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많은 상을 수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드뇌르를 1913년 여성 작곡가로서는 최초로 수상함으로써 그녀의 공적을 인정받게 된다. 레지옹 드뇌르는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수훈을 세운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훈장이었기 때문에 주로 남성들에게 수여되는 훈장이었는데 이 훈장을 세실 샤미 나데가 받은 것은 그녀 개인뿐 아니라 프랑스 내의 여성 예술가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곡은 멜로디가 아름답고 들으면 쉽게 익혀지는 주제로 많은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플루트 콘체르티노는 현재까지도 매우 인기가 있는 곡이다. 이 곡은 1902년 프랑스 음악원에서 그녀에게 의뢰해서 만들어진 곡으로 프랑스 음악원에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 제시할 시험 곡으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3) Cécile Chaminade - Concertino for flute op. 107 - Duo du Rêve - Thank you Miyazawa flute - YouTube


이 곡은 현재, 플루트를 전공하는 학생들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교과서적인 곡으로 연주자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는 테크닉적인 부분과 서정적이면서도 강렬 주제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곡이다.   

   

나는 이 곡을 중학교 때 처음 들었다. 듣자마자 너무 좋아서 길거리를 다니다가도 이 곡의 멜로디를 흥얼거렸던 기억이 있다. 막상 샤미 나데 플루트 콘체르티노를 배우게 되었을 때는 기술적인 것들을 익히느라 곡을 작곡가나 곡의 배경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을 못 했다. 하지만 학업을 마치고도 여전히 가끔 악보를 꺼내서 연주해보는 곡이고 누군가가 플루트 곡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목록에 꼭 들어가는 곡이 바로 세실 샤미나데의 플루트 콘체르티노였다. 그래서 나는 세실 샤미나데가 여성 작곡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이름이 ‘세실’ 샤미나데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샤미나데가 남성 작곡가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곡가는 의례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뿌리 깊은 편견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세실 샤미나데 플루트 콘체르티노 악보를 꺼내 연습을 하는데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다.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의 질문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글쓰기였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편견은 남들이나 가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은 것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도 모를 만큼 뿌리 깊게 새겨진 남성 중심적인 사고가 놀랍기도 했다.     


세실 샤미나데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칭하거나 여성운동에 적극 참여를 한 작곡가는 아니었지만 평생 여성 관객들과 가까이하며 그들의 권위를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변화를 원하면 표현하는 방법이 어떻든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 이 글은 어쩌면 나의 작은 실천이자 반성문 인지도 모르겠다.          




         

이전 06화 불편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