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새벽 1시 11분이다. 시간이 순식간에 지날 정도로 완벽한 몰입이다. 책장을 넘길수록 의식이 선명해졌다. '와, 글 잘 쓴다.' 읽을수록 감탄이 잦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페이지를 닫으며 한숨이 터져 나왔다. 글 잘 쓰고 싶은 욕망이 있는 독자에게 이 책은 폭력적이다. 넘지 못할 산처럼 높고 깊이 있는 글 앞에서 좌절을 맛보게 하는 책이니 말이다.
신형철 작가는 김혜리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라는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그냥 잘 쓰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처럼' 잘 쓰고 싶다." 라는 이야길 한다. 딱, 지금 내 심정이 그렇다. '감히, 바로 이 사람, 신형철 작가처럼 잘 쓰고 싶다'
책 모임을 위해 작정하고 읽어가던 책이 좋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작가의 말처럼 짧은 인생을 아껴 쓰기 위해서 좋은 책 선정은 필수다. 이번 선정도 성공적이다.
책에 빠져있던 토요일 오후 3시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남편이다. 비가 오니 외식하자며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은지 말해달라는 전화다. 딱히 쉽게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딱히 먹고 싶은 음식이 없었다. "당신이 먹고 싶은 음식이 내가 주문하는 음식이야."라고 답했다. 그는 곱창 어떠냐고 물었고 좋다 말했다.
곱창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다행히 두 개 남은 자리 중 밖이 잘 보이는 시원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가게 안은 사람들의 대화와 고기 굽는 소리가 섞여 매미가 울어대는 여름산 같다 생각했다.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며 먹는 곱창은 또 다른 별미다. 그는 바삭하게 구워진 곱창을 내 앞에 자꾸만 놓아주었다.
식사를 마치자 곧바로 집에 가기엔 아쉽다며 그가 커피 마시러 가지 않겠냐 물었다. 마침 그와 함께 오고 싶었던 카페가 생각났다. 차를 돌려 카페로 가는 중 비가 간간이 내렸다. 최근 하루 내내 들었던 'When I Get Old"를 재생했다. 음악 소리에 맞춰 빗소리가 차창을 두드렸다.
넓고 조용한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가 맘에 드냐는 물음에 그가 맘에 든다고 했다. 그는 메뉴판을 보더니 아메리카노와 빵을 시켰다. 배부른데 굳이 빵을 사냐 말하자 그가 말했다. "쓴 커피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 달디단 빵이 있어야 하거든." 하긴 단맛은 커피의 쓴맛을 더 깊게 만든다. 단맛은 더 달콤해지고 말이다. 어울림이런 이런 거겠지.
아쉽게도 저녁 8시가 되면 문을 닫는 카페다.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들이 자리를 뜬다. 8시가 마감 시간임을 아는 이들인 걸 보면 단골이지 싶다. 가족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부부가 대부분이어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다섯 명이나 만났다. 아이들을 유독 좋아하는 남편 얼굴엔 미소가 한가득이다. 단란한 가족 자체로 아름다운 풍경인지라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우린 손님들이 하나 둘 나가고도 아쉬워 마감 2분 전, 7시 58분에 카페를 나왔다.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내렸다. 처마 밑에 있는데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남편이 뛰어가더니 두 사람을 가리고도 남을 큰 우산을 가져왔다. 비가 떨어지는 우산 안에 갇혀 우린 바람 따라 물결을 일으키는 저수지를, 바람에 꺾이듯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을, 어둠이 깊어진 숲속을, 비를 피해 달려가는 새끼 고양이를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빗소리가 커지자 우린 손을 잡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비를 피해 어둠 속으로 사라진 새끼 고양이처럼.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나를 완성시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내용처럼 고백이란 걸 하고 싶은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