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괜저의 책
연애와 술
『시간의 흐름』 시리즈 책들의 소재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나를 처음 매료시킨 작품은 한정원 작가의 『산책과 시』였다. 차분하지만 가슴이 뛰는 경험을 얼마 만에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읽은 책이 김괜저 작가의 『연애와 술』이다. 연애와 술도 내가 좋아하는 삶이다. 나도 내가 연애를 잘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술도 잘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술은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으면서 술을 좋아한다기보다 잘 마시고 싶어 했던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빈 잔을 봐야만 술집에서 일어서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는 순간에도 잔을 비우고 나와야 두 다리 뻗고 잠이 든다.
<나는 술을 따라놓고 마시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잔을 끝까지 비우는 데 아무런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나의 술친구들은 알고 있다.> p22
<술을 마실 때 나의 관심사는 술을 즐겁지만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지만 재수 없지 않게, 주변에 좋은 기운을 주면서도 남의 시선에 목매지 않는 사람으로 잘 마시는 데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빨리 마셔서도, 느리게 마셔서도 안 되고, 너무 나대도, 너무 고독해서도 안 되며, 결정적으로 너무 취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언젠가 나는 세상에서 술을 가장 적절히 잘 마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 않을까? 술을 딱 좋게, 적당히 마시는 것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다.>
와우~~ 술을 마시기만 했지 볼 줄 몰랐구나. 좀 멋져 보인다.
그렇다면 연애는? 저 술을 대하는 자세로 연애를 한다면 끝내주게 잘할 것 같지만 나는 기혼녀이다. 그럼 연애는 뭐지? 꼭 남녀가 하는 건가? 그래서 Daum 백과를 찾아봤다. 본 뜻과 바뀐 뜻이 있었다. 본 뜻은 연(戀)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리워하는 것. 연정이 상호교감하여 애정으로 자라는데 애(愛)는 서로의 마음이 오가는 친밀한 감정이다. 바뀐 뜻은 남녀가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사랑을 말하며 결혼을 약속하기 직전까지만 연애라 하고 결혼을 약속하면 연애한다고 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란다.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본 뜻의 넓은 마음이 왜 이렇게 협소하고 쪼잔하게 바뀐 거지? 우리의 생각은 언어 안에 갇히고 만다. 서로 마음이 오가면 연애지? 결혼하기 전까지만 연애라고 하는 것이라니....., 오호통재라.
나는 그가 퀴어라는 정보를 모르고 이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이 아이는 동성애자였구나. 동성애자라는 편견에 가려 그의 연애는 매우 조심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이성애자와 다르지도 않다. 서로 엇나가기도 하고 잘 보이고 싶게도 하고 심장이 쿵 내려앉기도 했다가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처럼 갈라서기도 하는 것이 연애였다. 서로 마음이 오고 가는 일은 감정 소모가 많지만 매혹적인 일임에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나는 잘 알고 있다. 너의 외로움도 내 외로움처럼 이름이 없다는 것을, 연애를 못 해서인지, 친구가 필요해서인지, 권리가 침해당해서인지, 존재가 지워져서인지,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외로움. 그런 외로움은 몰아낼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만 아는 적당한 이름을 붙여주고, 가까이에서 길들일 일이라는 것을.> p199
<연애 역시 잘해야 하는 것들의 연속이다. 첫 만남을 어디서 할지부터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처음에 차, 밥, 술 중 뭘 먹으며 만날지에 따라 관계의 포물선이 완전히 다르게 그려질 수도 있다. 관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골라야 한다. 큰 나무를 작은 화분에 심으면 죽는 것처럼, 첫눈에 열정이 불타는 사람들이 카페에서 차 한 잔만 했다면 연애는 시작되지 않는다. 반대로 서로에게 돋보기를 겨누고 알아가야 할 사람들이 클럽에서 만났다면 그 역시 잘못이다.> p63
이 정도면 그가 술 못지않게 연애도 잘하는 사람 같다. 술과 연애는 매우 닮은 부분이 많아 정신줄을 놓게 되면 사고가 난다. 적어도 김괜저는 정신줄 놓을 사람이 아닌 것으로, 그저 세상 사람들에게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냐며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 것’ 그래, 이젠 술 한 잔 같이 마셔줘도 되지 않을까? 어깨춤 그만 추고 같이 ‘건배’합시다.
이 책에도 플라톤 ‘향연’의 한 대목이 나온다. 제우스가 신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인간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번개로 쪼개 놓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스의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가 처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신화 속 옛날 사람들은 둥글었다고 한다. 머리는 하나였으나 얼굴은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었고 손도 발도 모두 4개였다고 한다. 둥근 몸과 4개의 손발을 가진 인간의 힘은 신을 위협할 만큼 컸고, 위협을 느낀 제우스는 그들을 반쪽으로 쪼개 약골로 만들기로 한다. 그들을 두 쪽으로 나누고 의술의 신인 아폴론에게 치유하도록 한다. 그렇게 갈라진 인간들은 서로의 반쪽을 찾아 헤맨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양성이 있다는 것이다. 양성이었던 반쪽들은 서로의 이성을 찾아 헤매지만, 온전히 남성이었던 이들은 자신의 반쪽인 남성, 온전한 여성이었던 이들은 자신의 반쪽인 여성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신화는 허술한 인간에게 완벽한 것을 보여 준다.
이 이야기를 인용해 나는 나의 동성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썼다. 그 글을 읽은 이들은 나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같이 산책을 하면서 이슈가 되었던 양성평등법 조레(안)에 대해 비판했다. 내 글을 읽었던 그는 말끝에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그 폭력적 대화에 침묵했다.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기회가 된다면 계속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를 하겠다. 누군가의 어깨가 탈골될 때까지 춤만 추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의 어머니는 말한다. “그 걸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려고는 하지 마.”
그가 연애 얘기도 꽤 했는데 나는 연예보다 술 이야기가 더 많이 기억되었다. 연애보다는 술! 나는 거기서 자유를 느끼는 듯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술은 자유롭고 연애는 억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나의 연애를 억압했는가? 그건 Daum 백과사전의 바뀐 뜻이 아니었을까? 결혼을 약속하면 ‘연’은 빼고 ‘애’만 남는다니..... ‘연’ 없는 ‘애’가 다 무엇이람? 이런 날은 연사가 되고 싶다. “기혼자에게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허(許)하시오!”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둔 이 21세기 좁은 운동장에 돌멩이를 던지고 싶다.
김괜저의 글은 잔잔하고 비유와 상징과 은유가 있다. 눙치고 가는 맛이 있다. 좋은 사유들이 있다. 오랜만에 새벽 2시간을 할애하는 서평을 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