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당간당 배터리 4%의 삶

폰이 꺼져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습니다

by 평정

“엇, 배터리 4%다.”


아침에 비몽사몽 일어나 시계를 확인하려는데 스마트폰 배터리 잔량이 먼저 눈에 띄었다. 전날밤 충전을 깜빡해 새빨갛게 변해버린 배터리 아이콘이 새삼스러웠다. 꺼질락 말락 아슬아슬했지만 마음은 느긋했다. 당장 충전할 필요는 없었다. 금세 꺼진들 별 문제되지 않는다.


한때는 그랬다. 매일밤 머리맡에 둔 충전선을 스마트폰에 꼽고 잠에 들었다. 매일 아침에는 잘 충전됐는지 배터리 잔량을 확인했다. 출근한 뒤에도 몇 프로 남았는지 틈틈이 확인했다. 외근이라도 할라치면 보조 배터리를 챙겼다. 그렇게 언제든지 벨소리가 울릴 수 있도록, 메신저에 답할 수 있도록, 메일을 확인할 수 있도록 비상 대기했다. 누군가 나를 찾는다면 즉시 답할 수 있도록 말이다. 머피의 법칙처럼 방전이 되는 잠시 동안 꼭 연락이 오고, 심지어 옆사람이 왜 전원이 꺼져 있냐며 대신 연락을 받으니 아쉬운 소리 하지 않으려면 배터리 사수는 무조건이었다.


이제와 한 발 떨어져 보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업무 연락이 당장 안 된다고 해서 큰일이 나진 않는다. 전화, 문자, 모바일 메신저뿐 아니라 PC 메신저, 이메일 등 대한민국 직장인은 다양한 연락 수단을 갖추고 있기에, 다른 방법으로 우회하여 메시지를 남겨 놓을 수도 있다. 폰이 꺼졌다 한들 금방 재충전하는 게 우리 한국인이다. 다만 사달이 나는 건 폰이 다시 켜지고 응답하기까지 그새를 기다리지 못하는 급한 성격 혹은 이기적인 누군가들 때문이었다. 막상 들어보면 별일이 아닐 때도 많다. 그럼에도 사람은 상호 교류하는 사회적 동물인지라 상대방의 호들갑에 말려들기 마련이다. 인내심을 갖고 평정심을 유지하려 해도 덩달아 조급해지게 되니, 이 얼마나 정신적 피로가 심한지 모르겠다.


통화 수락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마음을 준비를 했다. ‘무슨 일로 전화했을까,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앞서 생각하며 긴장하기도 했다. 상대방에 따라 어떤 톤으로 받을지 고민하며 목소리도 갈무리했다. 부정적인 이슈가 예상되는 날에는 심장이 쿵쾅거려 제발 전화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실시간으로 빠르게 쌓여가는 메신저만큼 기력은 낙하했고, 손바닥만 한 화면으로 메일을 확인하고 답하고 있노라면 문득문득 어질했다. 전화와 문자와 메일이 시간차 없이 콜라보를 이뤄 공격할 때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러다 스마트폰 배터리 닳는 속도보다 내 에너지 닳는 속도가 더 빠르지 않을까 싶은 나날이었다.


백수가 된 지금은? 그 모든 것에서 해방되었다. 더 이상 배터리를 실시간으로 체크할 필요가 없다. 아니, 폰을 의무적으로 옆에 두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5분 대기조의 긴장감에서 벗어났다는 건 큰 기쁨이었다. 벨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허겁지겁 받곤 했는데, 오는 연락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에서의 탈출이었다. 오로지 나의 필요와 여흥을 위해 폰을 찾는다.


좋든 싫든 더 이상 빈번하게 나를 찾지 않는다는 건 내 쓰임이 없어진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는 법. 고요한 일상에 어쩌다 울리는 전화벨과 카톡 알림음의 소중함을 느낀다. 걱정보단 호기심과 반가운 마음으로 즐겁게 안부 인사를 나눈다.


100%가 아닌 4%로도 불안하지 않는 삶, 여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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