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딱지 붙이고 초보 운전 딱지 떼기
회사에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친척 분께서 새 차로 바꾸시며 기존의 차를 처분하려다 내가 생각나셨단다. 오래되긴 했지만 한동안 운전 연습용으로 끌기엔 나쁘지 않아 원하면 물려주시려 했다. 평소 차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공짜로 주신다기에 냉큼 “네!” 하고 받아 왔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중고차 한 대를 얻었다.
“6개월만 끌고 빨리 운전 실력 키워서 새 차 사.”
키를 받을 때 들은 덕담처럼 나도 그럴 줄 알았다. 모두들 첫 차는 여기저기 긁는다곤 했지만 나는 왠지 한 번도 긁지 않을 것 같았고, 운전도 금방 능숙해져 차도 곧 바꿀 줄 알았다. 쉽게들 얘기하길래 정말 쉬울 줄 알았다. 그렇지만 만사 마음먹은 대로 되나... 그 차는 여전히 주차장 한편에 자리를 지키고 있고, 뒷유리에는 “초보 운전” 스티커가 4년째 붙어 있다.
운전은 매일매일 해야 실력이 는다는데 서울 강남까지 출퇴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신 주말에 틈나는 대로 지인들에게 도로 연수를 받았다. 그러면서 깨달은 건 운전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는 거였다. 나만의 에어컨, 나만의 노래방, 나만의 휴식 공간이 될 정도로 편하고 좋다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여전히 대중교통이 편했다. 쫄보 초보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비상 상황에 대비하여 운전 실력만큼은 갖춰 놓아야 할 것 같아 기회 될 때마다 몰았다.
그리고 (지금 보면 전혀 아니었지만) 곧잘 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콧대가 높아질랑 할 때 박.았.다! 느리게 후진하며 돌다 주차되어 있던 차와 살짝 닿았는데, 실제로 스친 건지 아니면 나의 착각인지도 잘 체감되지 않았다. 차주 분께서도 진짜 박은 건 맞냐고 물어보실 정도였다. 피해가 있는지 없는지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아주아주 경미한 사고에, 감사하게도 훈방 조치되었다. 당시에는 혼자 패닉에 빠져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그저 감사하다 고개만 연신 꾸벅했는데, 뒤늦게 차주 분께 치킨 쿠폰이라도 드릴걸... 하고 무척이나 후회했다. 자책과 반성과 자괴의 시간을 지나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을 땐 시일이 지난 뒤였다.
후폭풍은 상당했다. 별 거 아니라고들 했지만 나에게는 마치 차를 반파시킨 심각한 추돌 사고 같았다. 스스로 자신하고 있던 상황에서 벌어진 실수여서 더 어이없고 황망하게 느껴졌다. 다들 운 좋았다고, 좋은 분 만나 좋은 경험 했다고 엄지척했지만 내 간은 콩알만큼 쪼그라들어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자신감은 수직 하강하여 이제 운전이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예전에 겁 없이 운전하던 모습을 돌이켜보니 아찔하니, 사람 잡는 선무당이 따로 없었다. 사고 자체는 별일 아니라고 계속 마인드 컨트롤했지만, 막상 운전대를 잡으려 하면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억지로 긴장을 누르고 나온 도로 위에는 어딜 가도 차가 많았고 눈 깜빡하면 부딪힐 것 같았다. 직진만 하고 있는 데도 주위의 모든 차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애물단지로 전락한 차는 배터리 방전을 막기 위한 용도로 동네에서 뜨문뜨문 운전되었다. 즐기지 못하니 주말에 쉴 때에도 운전할 에너지가 생기지 않았다. ‘꼭 가야 할 곳도 없는데 굳이?’ 주 7일은커녕 주 1일 운전도 할까 말까 한 상황 덕분에 실력이 늘 만하면 멈추고 늘 만하면 멈추는 답보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필요할 때만 최소한으로 운전하며 할 수 있지만 못하는, 못하지만 할 수 있는 상태로 몇 년이 흘렀다. 반년에 한 번씩 기름을 넣으니 휘발유 가격이 오른들 별 타격도 없었다. 웃픈 일이었다.
그런데 백수가 되고 나니 운전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심신의 스트레스가 0이 되어 그런지 지금이 정든 초보 딱지를 뗄 적기인 것 같았다. 주말이라면 엄두도 못 냈을 텐데 평일에는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평일 낮에는 한산했다. 전세 낸 것 마냥 텅 빈 고속도로에서도 차선을 바꾸고 속도를 내며 장거리도 여러 번 왕복해 봤다. 80킬로에 후들거려 놓고는 과감하게 100킬로를 밟기도 했다. 운전할 생각에 전날부터 한참을 호들갑 떨곤 했는데 점점 평정심을 찾으면서 로딩이 줄고 출발이 자연스러워졌다. 제자리걸음 같았던 운전 실력이 시간에 비례해 느리지만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문제는 여유가 없어 앞으로 내딛지 못하는 마음이었지.
내가 운전하기로 마음먹은 건 다~ 백수가 되어서다. 백수의 장점은 일주일의 모든 시간이 다 내 것이고, 하루에 한 가지 생각만 해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거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원치 않게 떠오르는 생각들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에너지를 소모시키곤 했는데, 그 모든 것에서 떨어져 있는 지금은 자의적으로 스위치를 켜고 끌 수 있게 되었다. 내일이 아닌 오늘을 생각하며 지금에 집중하는 것, 누군간 한량이라 보겠지만 나에겐 필요에 의해 행동하여 얻은 결괏값이다. 덕분에 내키지 않던 일에도 손을 뻗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대로라면 최소한 운전 실력만큼은 더 늘겠지. 여전히 미숙한 실력에 갈 길이 멀지만 쭉쭉 밟다 보면 언젠가 강남 한복판을 달리는 그날도 오리라.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어, 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