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칩이 탈착되었습니다

캐시도 한 번씩 정리해 줘야지

by 평정

(구) 직장 동료를 만났다. 이벤트 없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의 일상을 짧게 공유한 뒤 매일 만나던 사람들의 근황을 듣고, 새로운 일 얘기를 듣고, 회사 상황을 들었다. 별일 아닌 일도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로 변했던 터라 도파민 터지는 이야기들을 고대했는데 미지근했다. 동고동락하며 겪은 다 아는 그 이야기를 다시금 한바탕 늘어놓는 데 어리어리했다. 이래서 소속감이 중요하다고 했던가.


“아, 그, 왜, 그분. 그 누구죠?”


기어코 짧지 않은 시간 함께 일했던 이의 이름까지 깜빡했다. 너무하다는 둥,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잊었냐는 둥, 우스개 핀잔을 들었는데 그러게요, 왜 기억이 안 났을까. 평소 떠올릴 일이 없어서 그랬나? 순간적으로 정말 하얗게 기억나지 않았다. 업무적 관계일 뿐 딱히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었던 지라 당사자에게는 소소하게 미안할 뿐이었다. 비록 그분은 나를 퇴사함과 동시에 잊었을지 몰라도.





사실 직장에서 나는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었다. 몇 년 전 일도 곧잘 기억했고, 옛 자료도 바로바로 찾아냈으며, 다른 사람이 담당한 프로젝트도, 귀동냥으로 들은 말들도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수많은 프로젝트의 히스토리와 회사의 대소사를 알고 있는 건 나만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기억력이 좋다는 건 분명 장점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가 되기도 하여, 가끔은 기억나지 않는 척 짐짓 오리발을 내밀기도 했다. 아무튼 스스로가 피곤할 정도로 기억을 쌓아두곤 했는데 퇴사와 함께 펑 날아간 것이다.


걱정할 정도인가? 아니, 그렇진 않다. 필요한 정보들은 머릿속에 다 있다.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던 때와 다르게 지금은 뾰족한 자극에도 무디게 반응할 만큼 좀 풀어져 있을 뿐이다. 매일매일 방문 기록이라던가 쿠키, 캐시 등이 새록새록 쌓이는데 직장인 시절과 거리가 생기니 불러오는데 버퍼링이 약간 생기는 그 정도?


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보기와 다르게 입이 무거운 아이,라는 평가는 사실 잘 잊어버렸기 때문. 리액션이 좋은 아이,라는 평가는 기억나는 척하느라 맞장구를 잘 쳐준 것이고. 주요한 골자 속에 소소하게 필터링되는 잔가지들이 많았다. 다만 회사에서는 하나하나 모든 걸 중요한 데이터로 인식했나 보다. 몇 년 치를 저장하고 있느라 그렇게 피곤했었나? 순간순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던 삶에서 놓치면 놓치는 대로 흘러가 보니 이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쌓이고 쌓이면 무거워진다. 과부하가 오면 손쓸 수 없게 타버리는 수가 있다. 가끔씩 최적화를 통해 비워 놓아야 다시 속도가 살아 나는 법. 지금 당장 플러스가 되지 않는 것들은 삭제하고 메모리 칩은 한동안 빼놓아야겠다. 언제고 필요할 때 재장착 가능하니까.


너무 오래 안 써서 고장 나면 어떡하냐고요? 품질 보증 Made in Korea! 자신을 믿으세요!



keyword
이전 08화Enjoy, 방구석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