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가봐야, 이생망

그냥 재밌게 살아

by 무진

“재미없으면 하지 마”


아이가 뭐든 배우고 싶다고 하면, 학원에 다니게 해 주었다. 무엇이든 재밌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초등학생이 돼서 해야 할 공부도 생겼고, 내년에 2학년이 되면 아빠의 휴직도 끝난다. 그땐 돌봐 줄 사람이 없어 어차피 온종일 학원에 다녀야 한다. 미리부터 학원을 억지로 다니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은 걸 배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무언갈 학교에서 3학년 때 배우게 되어있다면 그게 정답이라 생각한다. 어린이집 때부터 한자시험을 보고, 초등학교 때는 중학교를, 중학교 땐 고등학교 과정을. 빨리 가는 게 뭐 그리 좋을까. 어른이 되고 보니, 그렇게 빨리 가도, 막상 어른이 되어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는 사람들도 참 많다. 길을 잃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외치는 어른 중에, 어릴 때 꽤 빨리 달리던 사람도 많다.


아빠의 이런 수더분한 교육철학으로 닥친 위기가 있으니, 바로 학급발표회다. 학급발표회는 장기자랑 같은 거였다. ‘줄넘기, 태권도, 악기연주, 춤, 시 낭송, 동화 구연’ 같은 것들이 예시였다. 다른 아이들은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다, 학원에서 준비를 도와주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남자아이들은 태권도 학원. 여자이이들은 피아노 학원을 정규 교과과정인 양 많이 다녔다. 배움도 배움이지만, 맞벌이 부부가 퇴근할 때까지 아이를 맡길 목적으로 보내기도 한다.


우리 딸도 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입학하자마자 피아노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몇 달 다니다 그만 다니고 싶다고 했다. 놀이일 줄 알았던 피아노가 학습이라 힘들어했다. 막상 아이가 배우던 걸 그만둔다고 하니 솔직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평소 하던 말이 있어, 바로 그만두게 했다. 그런데 막상 학원에서 학급발표회 때 써먹을 만한 악기 연주를 알려주는 걸 보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계속됐다. 딸은 어릴 때부터 발레를 해왔지만, 교실에서 옷까지 갈아입으며 하기는 무리였다. 점점 발표 주제 제출 날짜는 다가왔다. 할 수 없이 그나마 가장 준비가 필요 없어 보이는 시 낭송을 골랐다. 그러면서도 시를 모두 외워서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시 낭송으로 종목을 정하고 나니, 직접 지은 시를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시로 써보자고 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평소 했던 말들만 모아 시를 만들어 주었다. 휴직하고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대화 내용을 종종 메모장이나 SNS에 적어두었기에 가능했다. 얼마 후 선생님께서 악기 연주 같은 걸 하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그러면서 어떤 발표를 할 건지 물어보시기에 자작시를 보내드렸다. 선생님께서 접수를 다 받고 보니 이런 항목은 없다며 좋다고 하셨다.


발표회는 노래, 율동, 악기연주가 주류였다. 카주라는 처음 보는 악기 연주는 무려 6명이 같이했다. 오카리나도 3명이었다. 이렇게 악기연주로 많은 아이가 지나갔다. 여러 명의 태권도 시범이 이어졌고, 4명의 아이가 줄넘기를 선보였다. 시작하며 보여 준 2단 뛰기, X자 뛰기 같은 건 기초적인 동작으로 보일 정도였다. 서로의 파트너와 함께 묘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4명이 함께하는 줄넘기로 기교를 뽐내기도 했다. 과장 없이 정말 서커스 수준이었다. 내 친구 아들도 그 줄넘기의 멤버였다.


친구에게 웃으며 물었다. “야, 대박이다. 애 혹사시킨 거 아니야?”

친구도 웃으며 말했다. “난 잘 몰라”

줄넘기는 학교에서도 운동으로 지도해 주지만, 복지관에서 또 따로 배운다고 했다.


아이돌 댄스 공연도 두 번 있었다. 방과 후 교실에서 방송 댄스를 배운 친구들이었다. 마술은 3명의 친구가 공연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직접 지도해 주신 것 같았다. 가장 놀라웠던 건 멜로디언 연주였다. 물론 그냥 멜로디언 연주가 아니었기에 놀라웠다. 훌라후프를 돌리면서 한 손으로 멜로디언을 들고 입에 호스를 문 채 다른 손으로 건반을 연주했다. 긴 연주에도 훌라후프가 아래로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른 공연보다 그 발표가 좋았다. 초등학교 1학년이 할 수 있는 한 한껏 뽐을 내면서도, 아이다운 순수한 모습이라 느껴졌다.


여러 가지 화려한 공연 속에 딸의 시 낭송 차례가 돌아왔다. 혼자 교실 앞으로 나가, 시가 인쇄된 종이를 들고 차분히 낭송했다. 특별한 환호도 없이, 별다를 것 없이 그렇게 학급발표회가 끝났다. 화려한 공연을 한 친구들을 보고 나니, 아이는 조금 서운한 감정이 들었나 보다. 자기는 잘하지 못한 것 같다며 풀이 죽었다.


“배워서 하는 것도 물론 멋진 일이야. 하지만 너 스스로 생각하고, 그걸 말로 표현하고, 또 남들 앞에서 발표까지 하는 건, 어른들도 살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야.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네가 정말 잘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1학년 때 싫다던 피아노를 2학년이 되어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1년째 재밌다며 다니고 있다.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있지만, 2학년 학급발표회 역시 시 낭송을 골랐다. 이번엔 아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작시를 지었다. 엄마에게 들려주는 걸 얼핏 들었는데 아빠를 강도 높게 비난하는 내용인 듯 하다. 시가 교실에 울려 퍼질 걸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그 후 선생님과 어떤 조율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겠다. 최종적으로 교과서에 있는 시로 하고, 1학년 때와 달리 암송하기로 결정됐다.


1년 동안, 아이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속도만큼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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