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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 Sep 05. 2022

여보, 나 제주 가서 혼자 좀 지낼게.

마흔셋에 첫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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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셋. 첫날. 2022년 1월 1일. 별다른 것 없는 토요일 아침. 게으르게 일어나 리클라이너에 누워 책을 펼쳤다. 올해의 첫 책은 『여보, 나 제주에서 한 달만 살다 올게』. 며칠 전 직장에서 실시하는 1년짜리 장기교육을 신청해놨다.     


1년 동안 정책연구 및 논문 제출, 발표·진행 연습 등 팀장에게 요구되는 능력을 향상하는 교육이다. 이 교육은 신청자가 많아 경쟁률이 꽤 높다. 팀장으로 중간관리자가 갖추어야 할 역량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은 무슨…. 다들 출근하기 싫어서지.     


아무튼 2021년에 교육받은 선배들은 코로나19 때문에 교육원으로 출근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교육을 받았다. 이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된 순간! 사이버 교육은 어디서나 받을 수 있으니 제주에서 한 달 살기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아내에게 “나 교육 선발되면 사이버로 할 수도 있으니까 제주도 한 달 갔다 올게”라고 했다. 한마디로 말 같지 않은 소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서 『여보, 나 제주에서 한 달만 살다 올게』를 사서 거실 우드 슬랩에 놓아두고 읽고 있었다. 4학년 첫째가 TV 방으로 들어가 외쳤다. “엄마, 아빠가 책을 보고 있는데, 제목이 여보, 나 제주에서 한 달만 살다 올게야, 으하하하”      


마흔셋의 1월 1일. 책 한 권을 다 읽고 원두를 갈아 커피를 한 잔 내리며, 올해 첫 음악은 무엇이 좋을까 생각했다.     


다행히! 교육에 선발됐다. 한 달 머물 숙소를 골랐다. 차를 싣고 갈 배편도 예약했다. 제주도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은 전생에 내가 나라를 구한 횟수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대략 두 번 정도 구한 거 같다는 결론이었다. 그래도 2월보단 3월에 가는 게 날도 따뜻하고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코로나가 약해지는 추세여서 언제 교육원으로 출근할지 모르니, 날씨고 뭐고 당장 가겠다고 했다. 외국과 제주에서 한 달 살기, 일 년 살기가 유행한 지도 오래다. 그런 유행을 보며 난 은퇴하고나 할 수 있겠지 했다. 지금이 아니면 은퇴할 때까지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그런 사정을 알기에 결국 흔쾌히 다녀오라고 응원해줬다.     


처음 입사했을 때 자취했던 경험을 빼면 혼자 사는 경험은 처음이다. 그땐 출근하고 저녁엔 비슷한 처지 동료들과 매일 저녁 식사를 같이했으니 진정으로 혼자도 아니었다. 사실상 혼자 있는 경험은 태어나 처음이다.     

사람들하고 복작복작 회식하면 말 좀 그만하라는 말을 들었다. 코로나 안 걸린 게 이상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비서 생활도 했다. 그러다 제주 와서 혼자 가만히 앉아 따뜻한 볕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온전히 혼자구나’ 하며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참 힘든 시간이었겠구나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나를 다시 알아차린다.     


제주에서 하루 내 나가지 않는 날도 있다. 책 읽고 음악 듣고 밥해 먹고. 너무 집에만 있는 것 같으면 산책을 한 시간 반 정도 한다. 물론 산책길에 만나는 브라운, 그린, 블루가 조화롭게 있는 정경은 예사롭지 않지만, 육지 집에 있을 때와 다르지 않은 생활이다.     


그래. 꼭 제주일 필요는 없구나. 행복은 어디에나 있구나 싶다.

아, 당연히 제주에는 조금 더 있다. 제주의 색깔을 잘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그렇게 제주에서 좋은 날을 보냈지만, 막상 제주로 떠나기 며칠 전엔 가야 하나 싶은 귀찮은 마음이 들었다. 차를 끌고 완도로 출발하는 당일 저녁에도, 아이들은 어쩌고 내가 이러나 싶었다. 그런 내 모습에 내가 당황했다. 이십 대 때 카메라만 들면 비눗방울처럼 둥둥 뜨던 내가 아니었다.     


우리는 쉬고 싶다, 승진하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다, 뭘 하고 싶다 하지만 실제론 한 걸음도 내딛지 않는 때가 더 많다. 하다못해 제주에 혼자 있으라면 못 견딜 사람도 많다. 제주에서 지내며 “제주 가니 좋아?”라는 말을 인사로 들었다. 물론 좋다 한다. 제주 와 있는 나를 너무 부러워하면, 난 웃으며 물었다. “여기 혼자 와있으라면, 있을 수 있겠어?” 대부분 “난 못 있지.”라고 한다.     


좀 더 어렸을 때처럼 박차고 일어나는 힘보다 관성이 더 강해졌다.

관성이 붙으려는 발을 잘 살펴야 할 마흔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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