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진 Aug 20. 2022

사는 게 재미없으면 술을 바꿔

마흔둘 아저씨의 첫 위스키

☞ 공무원으로 살아남기 시리즈 전편 편하게 보기


“나이 먹어서 그래” 친구들에게 30대부터 들었던 말.

“사는 게 재미없다” 친구들에게 언제부터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말.   

  

대학교 때 처음 술을 마셨다. 과 전체 학년이 학교 앞 술집에서 모였다. 소주를 처음 마셨다. 아무렇지 않았다. 형도 잘 마시고 아버지도 잘 마시니, 유전이구나.     


그렇게 소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소주에 박카스를 타서 마셨다. 대학생 땐 맥주 맛을 알았고, 대학을 졸업할 즘엔 소주 맛도 알았고. 직장인이 됐다. 더 많은 술을 마셨다. 소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셨다. 직장생활의 술은 단연 소주. 삼겹살과 소주. 회와 소주. 감자탕과 닭볶음탕과 소주. 중국 음식과 소주.      


그렇게 직장생활도 지칠 즘. 물론 술에 지친 것은 아니다. 육아휴직을 했다. 아이가 어려 매번 배달 음식을 먹을 수 없어 못 하던 요리도 했다. 요리하며 마트도 자주 들렀다. 마트 주류 판매대에 엄청나게 다양한 술이 있었다. 대형마트 중에 규모가 작은 편인 우리 동네 마트에도 이 정도의 술이 있구나. 세상엔 얼마나 많은 술이 있을까.     


파스타나 스테이크를 요리 할 때면 와인을 한 번씩 사봤다. 와인 종류가 너무 많아 고르기 어려웠다. 추천받은 저렴한 와인들 위주로 조금씩 마셨다. 계란후라이도 못하던 사람이 요리해서 저렴하지만 그래도 와인을 곁들여 식사하니 고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게 와인과 친해졌다. 가끔 밤에, 치즈에 와인 한잔을 하기도 했다.     

소주를 밖에서는 잘 마시지만, 왜 그런지 집에서는 소주를 마시고 싶지 않다. 주변에 보니 생각보다 그런 사람들이 꽤 있다. 반대로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실 때도 소주만 마신다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늦은 밤 집에선 영화를 보며 혼자 술 한잔할 때, 무조건 맥주였던 것에서 와인이 추가됐다.     


친해졌지만 와인은 역시 알기 어려운 녀석이다. 책도 몇 권 읽어봤지만, 늘 뭔가 속이 복잡한 느낌이다. 아무래도 낯선 언어로 되어있어 그런 건지, 아니면 값싼 와인만 그것도 거의 한정된 종류를 설렁설렁 마셔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래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그 순간의 공간과 공기를 풍성하게 해주는 느낌에 와인이 종종 생각날 때가 있다. 그것만으로 괜찮다. 




2021년 1월. 나온 지 한참 된 영화 『소공녀』를 봤다.     


-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네요. -     


주인공은 ‘미소’라는 젊은 여성. 위스키, 담배, 남자친구. 미소에게 필요한 건 이 세 가지뿐. 미소는 물건도 없는 방에서 산다. 한겨울이 그대로 내려앉은 방. 추위가 질투해 남자친구와 옷 벗고 섹스도 할 수 없는 방. 그런 방의 월세가 오른다. 담뱃값은 두 배도 넘게 오른다. 한 잔 위스키 가격마저 오른다.     


회사 기숙사에서 사는 남자친구는 중동을 가겠다 한다. 2년 뒤 같이 살자고. 돈을 벌어오겠다고. 생명 수당이 있다고. 그렇게 ‘미소’는 집도, 치료를 위한 약도, 남자친구도 빼앗긴다. 누구에게 빼앗긴 건진 모르겠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녀 곁에 부디 위스키와 담배만은 머무르기를 바랐다.     


한동안 내 마음을 붙잡고 뒤흔든 이 영화. 그래서 위스키를 마시고 싶어졌다. ‘미소’가 한 잔씩 사마신 위스키가 궁금했다. 위스키를 한 잔씩 사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도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그것은 위스키 바라고 했고, 인터넷에 찾아보니 술은 『글렌피딕 15년』이라고 했다.      


동네 마트에서 인터넷에서 본 15년보다 비싼 가격에 12년을 팔고 있었다. 비합리적이지만 12년 밖에 없길래 영화의 여운을 느끼고자 바로 사 왔다. 그렇게 한 잔씩 마시다 보니 위스키가 마음에 들었다. 위스키는 모든 면에서 강력하고 단순하고 깔끔했다. 술의 종류도, 맛도, 잔도. 다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글렌피딕 12년은 내 입맛에 가장 안 맞는 위스키였다. 그래서 미소가 ‘15년’을 마셨나 보다. 역시 자본주의는 비싼….   

  

집에서 혼자 마시면 딱 두잔 정도가 좋다. 매일 마시는 것이 아니니 꽤 오랜 기간 마실 수 있다. 위스키는 처음의 맛과 병을 따고 시간이 흐른 뒤의 맛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다. 위스키는 언뜻 비싼 것 같지만 이런 이유로 오히려 경제적이다. 물론 마시지 않으면 제일 경제적이라는 사실은 위스키에 빠지고 한 참 뒤에 깨닫게 된다.     


위스키는 혼자서 아주 천천히 마셔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는 술이다. 소주처럼 마시면 그저 아깝기만 하다. 높은 도수의 씁쓸함에 감춰진 달콤한 향과 맛의 매력을 느끼려면 혼자 천천히 그리고 위스키에 아무것도 타지 않고 마시는 게 제일 좋다.     


나는 이렇게 마흔두 살에 내가 소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아직도 사람들을 만나면 소주를 잘 마신다. 하지만 이제 내가 소주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명확해졌다. 소주를 네 병씩 마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이 정신 나간 놈으로 보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위스키를 글랜캐런잔으로 두 잔, 혼자 마시는 게 제일 좋다.     


사람들은 소주를 마시면서 ‘사는 게 재미없어’라고 말한다.     

그런 때면 난 이렇게 말한다.     


“마트에 가보면 술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수백 종류의 술이 있어. 사는 게 재미없으면 술이라도 한 번 바꿔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