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이야기
관계에서 이해와 수용은 별개의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고자 함은 어디까지나 이해를 통해, 피할 수 있는 상처를 피하려는 노력이고, 그 이후의 수용은 이해함으로 맺어진 결과일 뿐이다. 관계 안에서 수용은 어디까지나 쌍방이어야 한다.
남편과의 관계를 개선 중이다. 물론 나 혼자만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남편의 입장은 알 수 없다. 무언가에 대한 이해나 개선에 대한 의지가 없는 기질이기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모든 걸 받아 드린다. 그래서 우리 둘이 크게 충돌 하진 않는다. 그러나 관계가 미적지근하고 여전히 잠재되어 있는 암초는 언제고 우리 사이에 충돌을 예고한다.) 이해한 선에서 나에게 상처가 덜한 쪽으로 남편을 대하고, 나의 태도와 말이 달라지니 반응이 평상시와는 다르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을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 떠안고 인내하려 할 뿐이었다. 부부관계에서는 일방통행이 통하지 않음은 혼자 애써 본 결과다. 부부관계만큼은 쌍방이어야 매듭을 풀 수 있다. 그 매듭을 나 혼자만 끙끙 앓으며 풀려고 했던 지난 시간이 참 아프지만 결국에는 풀 수 있는 방법을 위한 방편이었음을 자위해 본다.
최근까지도 관계 안에서 혼자만의 애씀을 짊어지려 한 패턴이 반복되다 더 이상 불필요한 것임을 알았다. 사실 더 이상의 노력을 할 기력이 다 했다고 하는 게 맞는 사실일 거다. 그렇다고 놓아버리고 싶진 않았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남편과의 화목을 지켜내고 싶었다. 그러다 두 권의 책을 통해 남편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씩 풀리는 중이다. 그중에서 독일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슈테파니 슈탈의 '거리를 두는 중입니다'는 보는 내내 감동 그 이상을 맛보았다. 오래도록 풀지 못한 난제가 풀리는 기분이랄까?
이 책 덕분에 남편과의 관계가 극으로 치닿을 수밖에 없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관계 안에서 스스로 살피고 질문을 던진 결과 딱 맞는 원인이었고, 결과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명확하게 확인하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어린 시절이 안정된 환경은 아니었다. 불운한 환경까지는 아니었지만 아이가 안정적 애착으로 성장하기에는 부족한 환경에서 자라왔다. 그렇게 각자 품고 있던 내면 아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불거진 것이다. 남편은 애착 결핍이고 나는 정서적 결핍을 가지고 관계를 맺은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통해 채워지지 못한 것이 배우자를 통해 해결되는 일도 있다지만 우리는 아쉽게도 서로가 채워주었으면 하는 욕구만 강했던지라 살아갈수록 상대에 대한 불만과 불평만을 키워오고 있었다. 자연히 부부관계에서 만족이란 찾을 수 없고 살면 살수록 미움만 커질 뿐이었다.
얼마 전 부부 기질 검사를 통해서 남편과 내가 극과 극의 기질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물론 성격이 안 맞는 건 애초 연애 때부터 알았다. 결혼 생황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사사건건 거슬리는 것 투성이었으니 맞는다고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서로 견뎌내었다. 그런 와중에 검사를 통해 테이터로 바라본 우리 두 사람의 기질은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신기하다. 스스로 분명 알고 있는 것과 정확한 테이터가 증명하는 증거물에 고개가 더 끄덕여지고 수용이 되니 말이다.)
내쪽에서 남편을 품고 사랑을 줄 수 있는 그릇이라는 것이 아쉽지만 아마도 내가 이 사람과 결혼을 선택한 이유가 분명 그런 부분을 채워주고 싶었던 내 무의식의 결과였을 거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현실 속에 더군다나 아이 셋을 주말부부로 키우는 나에게 남편에게 사랑까지 쏟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사실 억울하기 그지없는 상황 아닌가? 세 아이 양육과 집안일을 오롯이 혼자 떠안고 있는 입장에서 남편의 영역은 스스로 해결해 주어야 맞다고 생각하기에 남편에 대한 여지는 스스로 해결하도록 두게 되었다. 그렇게 남편이 요구하는 것과 내가 받아 드려줄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 우리는 자꾸만 어긋났다. 자꾸만 멀어지는 관계에서 결국 포기에 이르기 직전, 어쩌면 나 스스로 타협점을 찾은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 궁극의 해결책이 된 것이다. 역시 우리는 운명인 것인가?
이해는 시작되었고 이해로 인해 상처를 주게 되는 부분을 스스로 절제하며 남편을 대하고 있다. 이해했다고 수용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거나 수용만이 정답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관계 안에서 안전해야 하는 건 내 감정이다. 오롯이 떠안으려 했던 내 자아에, 나 스스로 인정하고 수용해 주는 구석을 알게 되므로 나를 지켜내는 힘이 생긴 것이다. 나를 지키는 일이 곧 관계 안에서의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주말에 남편과 나들이를 갔다. 평소에는 아이들과 뒷좌석에 앉지만 그날만큼은 남편 옆에 앉고 싶었다. 대화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 여겼기에 대화보다는 일방적으로 듣는 입장이었다. 남편은 다행인 건지 모르겠으나 말이 많은 사람이다. 정작 자신의 마음은 잘 비치진 않지만 말이다.
사뭇 우리 대화의 결이 달라짐을 느꼈다. 항상 톤이 높아지던, 대화라고 하기보다 투닥임에 가까웠던 서로의 억양이, 차분함을 유지하며 말이 주고받아지는 형국이 이뤄진 것이다. 남편은 전혀 의식을 하지 못했겠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대화 내용을 건네는 거 보니 그 사람 마음이 움직이는구나 싶었다. 마치 요술이라도 부린 듯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지며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쉽게 풀릴 수 있는 것을 그동안 그렇게 돌고 돌았구나 싶다.
해석되지 못한 상처를 서로 떠안고 그 상처에 매여 치유되지 못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 아픔이 분명 우리의 길이 되었음을 마음에 새겨본다. 부부 사이라는 건 끊임없는 토닥임과 살핌이 필요한 거 같다. 결혼 13년 차에 이제야 그 시작을 울리는 서막이 시작됐다. 여전히 투닥이며,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싹 달아나는 건 아닐 테지만 서로의 마음만큼은 전보다 서로에게 오래 머물게 되었다. 그거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