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가장 소중하다.
2018년 12월 31일, 약국에서 일하는 예랑이는 올해도 저녁 11시까지 근무였다.
다음날도 9시 출근이다.
2018년의 마지막 날과 2019년 첫날이 아닌 그저 출근하는 어제와 오늘일 뿐이었다.
나에게는 우리의 결혼식이 내년에서 올해로 바뀌는 변화였다. 떨렸다.
나는 예랑이와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퇴근이 문 앞까지 온 저녁 10시 35분쯤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영양제를 달라고 하시면서 얼마 전 영양실조로 쓰러지셨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 영양실조라니. 어쩌다 그러셨냐고 놀라서 물어보았다.
할머니께서 긴 시간 투병하시다 최근에 떠나셨다고 한다.
고위 공무원이셨지만 병간호로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계셨을 땐 끼니를 챙기는 것이 힘들었는데
혼자가 되니 편해져서 영 라면만 드셨다고 한다.
이번에 쓰러지시면서 사실은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챙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셨다. 막상 떠나고 보내니 아파도 둘이었을 때가 좋았다고 하셨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별이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올 수 있다는 것,
그 과정이 꼭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란 걸 상기시켜 주었다.
오늘 자정에나 들을 줄 알았던 보신각 종소리가 이미 내 가슴에서 울리고 있었다.
신혼의 달달함은 생각해봤어도 이별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 같이 넘어야 할 고개들을 생각하기에만 바빴다.
우리의 이별은 어떤 모습일까. 언제일까. 알 수 없음에 무서워졌다.
솜사탕을 먹고 있다 갑자기 은단을 씹고 있는 기분이었다.
예랑이는 이런 순간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있다고 한다.
그래서 늘 지금이 가장 소중하다고 한다.
내가 찡찡거릴 때면 예랑이는 지금이 가장 소중하다면서 날 달래주었던 터라
교과서 같은 말이라 여겼었다. 그 말의 진짜 무게를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출근하기 싫어서 종종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생각해보니 내일이 올 것이라 믿기에 할 수 있는 불평이었다.
앞으로는 출근을 안 하면 좋겠다고만 해야겠다. 나의 내일은 꼭 있어야 한다.
우리 둘 다 아무 말 없이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예랑이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우리 세계여행 갈까? "
예랑이는 지금을 소중하게 보내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본 것이리라.
듣자마자 여행이라는 지출 항목은 조금 전의 먹먹함을 바로 깨뜨렸다.
현실로 돌아온 내 머릿속에는 딱 한 단어가 생각났다. "안돼"
내 마음을 바로 표현하자니 어쩐지 이중인격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라
떨떠름한 표정과 함께 돌려서 대답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그래도 가야겠다 싶으면 다시 말해줘"
새해까지 1시간을 남기고 각자 집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제야의 종소리를 놓칠지도 모르니 말이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2018년의 끝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썰렁한 지하철 안에서 오늘을 다시 한번 되돌려보았다.
'어떤 행복이어야지 지금을 잘 보내는 거라 할 수 있을까?'
'죽음이 왔을 때 내가 아니면 우리가 후회하는 건 어떤 걸까?'
'나는 지금을 소중하게 보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