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응원이 정말 힘이 되었다니.
2019년 1월 3일. 아침부터 컨디션이 안 좋더니 오후에는 엎드려 있을 만큼 열이 심했다.
퇴근시간까지 버티다 바로 병원으로 갔다. 검사 결과, 뉴스에서 유행이라고 했던 A형 독감이었다.
인싸가 된 기분이었다.
저녁 11시, 예랑이가 퇴근하면서 전화를 했다.
예랑이는 A형 독감은 3일 정도 잠복기가 있는데, 아마도 약국에 왔을 때 걸린 것 같다며 미안해했다.
그럴 일이 아니기에 나는 괜히 질문을 했다.
"어차피 아플 거면 빨리 알면 좋을 텐데 잠복기는 왜 있는 거야?"
"균이 우리 몸안에서 조용히 세력을 넓히는 시간을 갖는 거지.
잠복기를 지나면 균은 더 많아지고 강해지는 거야"
다행히 주말이 되자 열도 더 이상 나지 않고 상태도 많이 호전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보는 예랑이를 못 보는 아쉬움은 전화로 위로했다.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예랑이가 무심하게 툭 말했다.
"계속 생각해봤는데. 세계여행 가고 싶어 "
나는 반사적으로 촉이 왔다.
가고 싶다는 희망사항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결심이란 걸.
그리고 결심은 곧 실행이란 것을.
머리가 아파왔다. 지금 나의 컨디션으로는 막아내기 힘든 주제였다.
"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예랑이의 세계여행 선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귀기 전에도 종종 말했었고 마지막으로는 2년 전에 그랬다.
세계여행이란 꿈은 예랑이와 4년 연애를 한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자신이 원하는 걸 하고 싶다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세계여행을 가야만 한다면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기다림은 없다는 조건으로. 귀여운 협박이 아니었다.
당시 내가 원하고 있던 결혼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예랑이는 한동안 고민하더니 나중에 같이 가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몇십 년 뒤에나 말하겠거니' 하면서 빛의 속도로 안심했었다.
그랬는데.
하필이면 결혼식이 4개월밖에 안 남은 지금, 왜 그 꿈이 봉인 해제된 걸까?
사별하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진짜 원인은 내손으로 선물한 책 때문인 것 같다.
당시 나는 응원한다면서 쿨한 척 부부가 다녀온 세계여행책을 선물했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게 인연이라 여기면서도 헤어지기 싫었다.
선량함을 가장한 잿밥 뿌리기였고 괜한 자존심으로 숨겨놓은 마음속 질척거림이었다.
나의 진짜 메시지는 이러했다.
' 세계여행은 책으로 대신하면 안 될까? 만약 정 가고 싶으면 혼자 말고 둘이 가자'
예랑이가 가지 않기로 하면서 나는 역시 진심은 통한다고 다시 한번 믿게 되었다.
고로 거짓은 안 통할 것이니 함께 준 거짓 응원에도 힘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반면, 응원은 자신을 태어나게 한 의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역할에만 아주 충실할 뿐이었다. 하필이면 말이다.
책은 예랑이의 침대 머리맡에 '세계여행'이란 제목을 품고 서 있었다.
하루를 보내는 아침에, 긴 밤을 맞이하는 잠자리에서 수시로 눈을 통해 마음으로 들어갔다.
깊숙이 밀려나 있던 세계여행의 꿈은 점점 차오르는 응원을 타고 떠오르다 몸 밖으로 나온 것이다.
꿈은 잠복기를 지나 결심이 되었고, 나중이라던 미래를 실행이라는 현실로 바꾸어버렸다.
그랬다.
예랑이가 그 결심을 키우는데 가장 조력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였던 것이다.
A형 독감은 3일 천하로 끝이 났지만 다년간의 키워온 세계여행의 꿈은 훨씬 더 강하다.
그리고 그만큼 단단하다.
나도 모르게 꿈을 키워준 사람으로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일까. 마음이 난감했다.
에잇. 부동산 책이나 줄걸!
PS. 나중에 예랑이에게 물어본 결과, 정말 책 표지를 보면서 늘 세계여행을 생각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