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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니 몰랐던 얼굴,엄마
04화
필기 우수자의 실기 탈락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by
맵다 쓰다
Oct 13. 2020
"언니~혹시 이유식 남는 거 있어?"
우리 집 근처가 친정이던 조리원 동기의 문자였다.
"이유식 2개만 좀 빌려주면 안 돼? 급하게 친정에 오느라 준비를 못해왔어"
"어? 응.. 그래"
거절을 잘 못하는 내 성격상 있는데 없다고 말을 못 한다.
말은 빌려가지만 어차피 우리 애는 내가 만든 거 아니면 프리미엄 시판 이유식도 안 먹는 아이란 걸 나도 알고 너도 안다. 그 말은 돌아올 일 없는 형태라는 것이다.
미안한 기색으로 간식거리를 손에 들고 와서 종종 내가 만든 이유식을 받아가는 그녀를 볼 때면 묘한 감정이 들었다.
우리 집에서 같이 놀다가도 새로 만들어 둔 이유식을 입에도 대지 않는 우리 아이를 보고 "안 먹으면 저기 남은 거 조금만 싸주면 안 될까?"란 말을 들으면 아깝고 말고 보다 "나는 무엇을 위해 만드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우리 아이 빼고는 다 잘 먹는 이유식을 열과 성을 다해 만드는 여자.. 그게 바로 나였다.
저녁 식탁에서 남편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우리 애가 밥을 안 먹을 거라고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어. 밥 먹는 게 이렇게 힘들 줄 어찌 알았겠냐.."
식사 때마다 '한입만 더'를 애걸하는 나와 비밀번호 모르는 현관문처럼 대책 없이 닫힌 아이 입을 번갈아 보
다 한 말이다.
듣고 보니 그렇다.
왜 상상 속 육아 스토리에는 이런 소소하지만 중대한 이야기가 빠진 채 구성되었을까?
아무리 기억을 털어봐도 내가 본 간접체험 어디에도 이런 장면은 없었다.
내가 흔히 보던 아이가 있는 삶이 드라마, 영화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현실에 기반을 한 이야기들 아닌가?
현실에 기반한 척하면서 픽션과 흥미위주의 이야기들 뿐이다.
출생의 비밀 같은 게 지영이. 민정이 이름만큼 흔하고 '강약 중강 약'이 아니라 '강강강대박강'처럼
역경을 차례로 극복하거나 재벌가로 시집가서 구박받다가 잘 먹고 잘 사는 이야기들 말이다.
어디에도 당신도 밥 안 먹는 아이 엄마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없다.
삶의 다양한 모습과 생각을 담아내 주는 게 미디어의 소임이라면 비록 인기 없더라도 그런 소소한 리얼 일상을 담은 스토리도 간간히 있어줘야 하지 않을까?
물론 있었어도 내가 안 봤을 가능성이 높지만 애꿎은 미디어 탓을 해본다. 왜 내가 아이 낳기 전엔
적나라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82년생 김지영'같은 게 보이지 않았을까?
"우리 애가 밥을 너무 안 먹어서 힘들다"란 생각을 말로 옮기면 헬륨 풍선처럼 하늘로 떠오른다.
내 손을 떠나면 그저 아름답게 둥둥 떠오르는 가벼운 문제란 말이다. 그 사실이 더 미치고 팔짝 뛰게 한다.
밥을 먹지 않아 태어나서부터 줄곧 애를 태우는 것, 설상가상으로 둘째까지 똑 닮은 입맛을 가진 아이를 둔 엄마로 사는 건 이런 것이다.
"그만 좀 먹어"라고 말하는게 소원일 만큼 유치해진다.
이렇게 억울해하는 데가 사실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내 직업을 들으면 하는 첫마디가 "애들은 뭐 먹여요? 무슨 반찬 해줘요?"이다.
초롱한 눈빛의 이들에게 기대에 못 미치는 대답을 해야 해서 억울하다는 건 아니다.
'영양사'란 직업적 소명을 앞서서 나는 정성을 다해 먹여보려고 애쓴 엄마였기 때문이다.
살면서 이토록 애쓴 적이 있을까?
밤새워 공부를 했다면 좋은 성적이라도 나온다.하지만 나의 애씀은 "뚜뚜뚜"소리를 내면 끊어진 수화기 속 일방적 대화 같다.
각각의 재료의 식감을 살려보려고 믹서기 한번 안 돌리고 내 손목을 혹사했고 다져진 고기 한번 산 적이 없다.
어쨌든, 부위별 단백질 함량을 따져가며 만들거나 영양소 파괴를 최소화하는 조리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먹지 않는다는 것.. 나는 못 먹는 유기농 재료들의 종착역은 싱크대속이라는 점이다.
"구슬도 꿰어야 서말" 옛 선조들은 어찌 이런 한 번에 공감되는 말을 만들어냈을까?
전문적인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아봐야 소용이 없다. 결국은 필기시험을 거쳐 실기에 통과해야 합격이다.
나는 숱하게 필기시험만 통과하고 계속 실기시험에는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육아는 필기와 실기를 아우르는 고도의 복합적 행위였다.
육아 실기를 어디서 갈고닦아 올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엄마란 자리에 대한 정신무장을 어디서든 예고편이라도 보여줬다면 좋았겠다.
바이블같은 임신, 육아 서적을 그토록 읽었건만 실전은 아무짝에 쓸모없었다. 미리 알았다면
인내를 위한 참는 연습,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을 하면서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에 시간을 쏟을 걸 그랬다.
먹고 자고 싸는 나의 본능적 행위들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잊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땀과 눈물로 이뤄졌음을 일깨우기 위해 인간이 인간을 기르고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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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실기
이유식
Brunch Book
알고보니 몰랐던 얼굴,엄마
02
오늘은 운수 좋은 날?
03
나는 이빨을 드러낸 어미개였다.
04
필기 우수자의 실기 탈락
05
당신의 육아서는 안녕하신가요?
06
모성애 속 이기적인 감정에 대해서
알고보니 몰랐던 얼굴,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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