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슬아의 가족

객관화할수록 솔직한 글

by 맵다 쓰다
일주일에 한 번 구민회관 노래 교실에 다니는 여자와 거실 중앙에 노래방 기계를 설치한 남자가 있었다.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노래 교실에 다니는 여자를 위해 남자가 반주 기계를 산 건지, 아니면 남자가 사놓은 반주 기계 때문에 여자가 노래 교실에 다니기 시작한 건지. 아무튼 나는 그들의 손주로 태어났다

< 아무튼, 노래>


이슬아의 글이다. 글이 시작과 함께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고전적 방식이다.

‘우리 집에는 나와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가 삽니다. ‘처럼 익숙하다. 우리 할머니는 이런 사람이고, 할아버지는 저런 사람이다 같은 가족 소개를 듣는다고 상상하면 독자는 하품을 할지도 모른다.

이런 평범하다 못해, 멋이라고는 전혀 없는 형태도 이슬아 작가의 손에 닿으면 불 맛이 느껴지고 육즙이 흐르는 문장으로 탄생한다.



이슬아의 글에는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 자주 나온다. 객관적인지 주관적인지는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판단할 수 있지만 마치 객관적인 듯 묘사한다.


‘우리 엄마는 예뻤다. ‘말하지 않고 ‘복희는 예뻤다. 몸매도 좋았다.’라고 한다.

‘향자는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렀다.’라고 할머니를 한발 물러서서 관찰한다.

‘할머니는 십 년간 취미로 노래교실을 다닌다’라고 했다면 지나쳤을 텐데, ‘일주일에 한 번 구민회관 노래 교실에 다니는 여자’로 표현된다.

누구의 할머니가 아니라 하나의 주체로 ‘향자’가 왜 십 년간 노래교실에 다녔는지 궁금해지게 만든다.


이슬아 작가의 글은 얼굴이 화끈거리게 솔직하다.

엄마 복희의 구제 가게에서 선물 받은 가운을 벗고 누드모델로 서는 순간처럼 숨김이 없다.

스무 살에 누드모델 일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가 단위 시간당 높은 수입을 받기 위해서라고 한다. ‘인간의 몸이란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긴다’ 같은 어디서 들어본 말이 아니라서 솔직한 그 이유가 ‘누드모델’이라는 단어와 어울리게 느껴졌다.

유난히 상체보다 하체가 풍성한 몸을 기형적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고 자신의 몸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미워했던 시간을 벗어나서 몸에 용기를 주고 싶었다고 한다.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건은 용기의 다른 말이다. 똑바로 바라보고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마음.


모든 걸 벗어던지고 사람들 앞에 서지만 이슬아 작가는 자신을 그리는 그들을 관찰한다.

날것으로의 나를 100% 받아들이지 않고서야, 그런 숨 막히는 여유가 나올 수 있을까?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부산에 떨어져 살던 우리는 휴게소 한 번 들리지 않고 다섯 시간을 달려서 안양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어둠 사이로 익숙한 대문이 보였고 불을 밝힌 초상집 등은 꿈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예측이 안되지만 슬픔과 눈물에도 리듬이 있다. 서럽게 울다가 맏며느리의 소임으로 부침개를 부치려 갔던 엄마는 문상객이 오면 다시 곡소리를 내며 울었다. 마치 슬픔을 멈추는 시간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렇지 않게 화투패를 돌리며 웃던 이웃들도 이따금 쓸쓸한 표정으로 병풍 쪽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나 역시, 오랜만에 만난 사촌들과는 반가웠고 놀면서 재밌기도 했다. 분명히 슬픈데 즐거움이란 감정도 느껴졌다. 깊고 큰 슬픔이 적셨다가 옅고 흐린 슬픔으로 말랐다를 반복했다. 원래 슬픔은 말랐다가 젖었다를 반복하면서 점차 희미해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한여름 4일장을 치러내는 아빠의 얼굴은 꺼칠했다. 한나절만 지나도 수염이 자라는 아빠의 얼굴은 덥수룩해졌고 상복 위의 검은 띠는 슬픔을 책임지는 자 같았다. 그렇다고 24시간 슬픈 얼굴은 아니었다. 며칠이지만 점차 눈물을 흘리는 시간이 짧아졌다. 죽음에 좋은 죽음이 어딨는지 모르겠지만 어른들은 호상이라는 말을 했다.

잘 놀다가도 이상하게 아빠가 눈물을 흘릴 때 버튼을 누른 듯 나도 눈물이 났다. 나의 할머니나, 아빠의 엄마나 같은 사람이고 같은 죽음이지만 나의 아빠는 엄마 잃은 아들이었다. 아빠의 눈물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보다 그런 아빠가 안쓰러워 같이 슬퍼졌다.


대상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상황과 인물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일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보다는 ‘엄마를 잃었다’의 슬픔 값이 크게 다가온다. 세상에 슬픔의 경중이 존재하지 않는단 걸 알지만 말이다. 할머니를 잃은 내 슬픔보다 '엄마를 잃은 아빠'가 되어보면 도무지 슬픔이 멈춰지지 않을 것 같았다. 대상의 슬픔 혹은 기쁨을 진짜 느껴보려면 가까이 다가앉아야한다. 바짝 얼굴을 대고 내 감정이 덮혀 보이지 않던 것을 관찰하고 다시 물러나 객관화해서 이해해야 한다.


대상에 가까이 다가갈때는 나라는 사람의 감정을 투영하지 않는다. 특히, 대상이 가까운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꽤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가족이나 연인처럼 가까운 대상은 나만의 프레임으로 보기 쉽다. 글에는 나의 이야기 뿐 아니라 내가 겪은 이야기 속의 타인이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작가도 신이 아니니까 전지적인 시야를 가질 수는 없지만 글로 옮기는 세계에서만은 대상에 가까이 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확대경을 가지고 헤지고 파인부분을 살핀다. 뭉뚱그려 슬프구나, 안돼었구나가 아니라 슬픔과 이유가 맞닿은 부분을 보다보면 의도치 않은 발견도 하게 된다. '몰랐는데 정말 아프겠구나!','내가 상처를 받은 줄만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겠구나!' 애쓰지 않아도 이해가 되고 상대와 감응이 되는 부분이 생긴다.



대상을 객관적이되 자세히 바라보면 내 슬픔이나 기분을 억지로 치장하지 않아도 된다. 쓰는 사람의 솔직한 마음이 나온다.

일 년에 한 번 보는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펐다’ 로 기억될 그날의 일은, ‘엄마를 잃은 우리 아빠가 가여워 더 슬펐다’처럼 마음에 시큰한 상처와 함께 아빠를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대상을 보는 느낌과 생각을 날 것, 그대로 객관화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그런 글을 속이려해도 속일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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