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문체
“역시 나는 소설 쓰는 재능은 없구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 쓴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스스로에게 한 말이다.
몇 달간 소설 비슷한(스스로 이렇게 표현했다)것을 썼긴 했는데 직접 쓴 자기가 읽어봐도 재미도 없고 마음에 호소하는 것도 남지 않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글처럼 느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쓴 소설이니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이며 능숙하고 멋진 소설을 써낼 수 없다면 자유롭게 써볼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느낀 것,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쓰기 위해서 발상을 전환해야겠다고 다짐한다.
PC가 보급되기 전인 70년대, 그는 만년필과 원고지를 내려놓고 붙박이장에서 잠자던 ‘올리베티 영자 타자기’를 꺼낸다.
알다시피 하루키는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다. 영자 타자기는 당연히 영어만 입력할 수 있고 말이다. 능숙하고 멋진 게 아닌 라면 '자유로운 것' 뭐든 ‘평범하지 않은 것’을 시도해보려고 영어로 글을 쓴다. 엄청난 영작 실력자는 아니었기에 외국어인 '영어'의 한정된 아는 단어와 구문으로 글을 썼다.
"영어"라는 언어가 능숙하지 못하니 점차 문장은 짧아진다. 아무리 멋진 문구도 영어로 표현해야 하니 머릿속의 생각을 가능한 한 단순한 단어로 바꾸고 의도가 쉽게 드러나게 풀어쓴다. 묘사에서 불필요하게 치렁거리는 부분은 없앤다. 그 기묘한 과정 속에서 문장에 리듬과 비슷한 것이 생겨나게 된다.
생각을 외국어로 표현하는 것의 재미를 발견하면서 문장의 리듬을 찾게 되고 그제야 만년필을 들어 원고지에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필연적으로 새로운 일본어 문체가 나타났고 그것이 ‘하루키의 문체’가 되었다.
하루키 이 글로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모조리 다시 써내고, 1979년 군조 문학상을 수상한다.
당시 문학계는 “이런 가벼운 소설은 문학이 아니다”라고 혹평을 했다. 이후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을 때도 “외국의 번역소설을 너무 많이 읽고 쓴 것 같은 겉멋이 든 버터 냄새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수상에 실패하기도 한다.
당시 정통성 있는 문학이나 소설의 형식이 아니었기에 정형에 가두어지지 않는 하루키의 글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새로움을 넘은 생경한 문체는 이상한 것이나 미흡한 흉내내기라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런 혹평에도 하루키는 신드롬이 된다. 반짝이 아닌 40년간 사랑받는 ' 하루키 문체'가 시작된다.
하루키는 당시의 ‘순수문학’이나 ‘소설 언어’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했다. 자신만의 음색으로 소설을 말하는’것을 목표로 했고 ‘재미없던 첫 소설’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쓴 것이다.
작가는 언어가 가진 유효성이란 폭을 넓혀갈 고유한 권리가 있고 그런 모험심으로 새로운 것을 탄생시킨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말처럼 작가는 언어를 기꺼이 새롭게 재탄생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당연하게 쓰던 것을 바꾸어보는 시도가 새로움이 된다.
당연하다고 믿어온 것이 차곡차곡 쌓이면 틈이 없이 견고해진다. 종이처럼 가벼운 것이든, 큰 의미 없던 것이라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굳어진다. 그럼 그 뒤를 따라오는 사람의 사고 회로 역시 자연스레 순응하면서 받아들인다.
정해진 것, 익숙한 것을 바꾸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의식을 모조리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것이다. 하루키가 일부러 영어로 문장을 쓰고 모국어로 다시 쓰는 일처럼, '어떻게 새롭게 쓰지?'가 아니라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있나?"를 확인해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이 익숙한 것을 흉내 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영어를 정규과목으로 접했던 중학교 1학년.
“hi, min-su”
“hi, su-jin”
“how are you?”
“I’m fine. And you?”
낭랑한 목소리로 읽던 영어 대화의 내용이다. 영어교과서 챕터 1에 나오는 지문과 그려있던 삽화가 수십 년 지난 지금도 기억난다.
영어책의 내용과 상황만 기억에 남은 것이 아니라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도 뇌에 새겨져 있다.
지금도 누군가 하와유? (how are you?)하면 “파인땡큐, 앤유? (I’m fine. And you?)”하고 답해야 할 것 같다.
“good.”,” great.’, “how about you”, “what about you?” , ’how do you feel?’라고 다른 대답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방심하면 I’m fine. And you? 가 먼저 떠오른다. 게다가 앤 유(And you?)까지 자동으로 나온다. 마치 무릎을 치면 다리가 위로 올라오는 척수 반사처럼 말이다.
암기식 교육의 폐해보다는 ‘교육받은 무의식의 힘’을 느낀다.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무의식에 저장한 것이 이렇게 오래 우리 안에 머물고 있다가 흘러나오고 있구나.
처음 글을 쓸 때, 신들린 키보드처럼 글이 술술 나와서 혼자 놀랬던 기억이 난다.
내 몸 어딘가 문장들이 숨어있다 그날만은 기다린 것처럼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알고 보니 내가 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거 아닐까?!’ 홀로 나지막이 미소를 짓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많은 분량의 글을 써본 후에 이유를 알게 된다.
이미 내 안에 체화되어있던 수백만, 수십만 개의 문장들 중 익숙한 문장이 손끝으로 나오는 것이다.
애쓰지 않아도 활자로 접했던 문장을 우리 안에 채우고 있었지만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라서 쓸 일이 없었을 수 도 있다.
현실 대화에서 “걔가 물어보더라”는 말해도 [그녀가 내게 물었어.] 같은 표현을 할 일은 없지 않은가? 글을 쓰게 되자 생각보다 많은 문장을 읽어왔다는 걸 알았다. 그게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도 모를, 어딘가 본 듯한 기시감도 든다. 분명한 건 익숙한 표현을 사용한다. 언어도 학습의 결과물이다.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아도 우리가 구사하는 글은 어떤 형식에 익숙해져 있고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만의 문체라는 것을 가지고 싶다면 익숙하게 따르고 쓰는 것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가 먼저이다.
비는 늘 억수같이 내리고, 심장은 튀어나올 뻔하고, 창백하게 힘이 없는 얼굴이여만 할까?
남발하는 클리쉐 투성이 문장을 벗어두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체한다.
'심장이 나를 집어삼킬 듯 귀 옆에서 뛸 수도 있다. ' 고 표현하려면 심장은 으레 두근대거나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심장이 어떻게 느껴지지? 움직인다고 해야 하나? 뛴다고 해야 하나?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외국인처럼 단어의 의미와 사용법을 다시 바라보면 익숙한 느낌과 상황을 새롭게 정의하는 게 가능해진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표현이나 다른 작품에서 영향이나 영감을 받지 않는 것은 없지만 그런 과정이 작가 고유의 글 매무새를 만든다. 평소에 입고, 먹고, 말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베어 들어서 분위기를 만든다. 자꾸만 생각과 상황을 익숙하게 나오는 틀에 가두지 않고 해체했다 다시 쌓아 올리며 생각하고 글로 옮겨보자. 그런 진짜 나만의 문장을 쌓여 작가만의 글이 된다. 하루키의 문체처럼.
미세먼지로, 보디로션으로, 땀으로 점철된 피부를 이태리타월로 문지르면 묵은 각질이 시원하게 밀려 나온다. 빨갛게 피부가 발적이 되고 때론 아프고 귀찮지만 목욕을 마친 후 기분은 꽤나 상쾌하다.
땀냄새, 취향 없는 향기로 덮혀진 글을 살짝 힘주어 벗겨보자. 보드랍고 말랑한 문체가 기다릴지 모르니.